[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39. 음악계 복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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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과 뮤직파워’의 1집 재킷. 필자는 활동 금지에서 풀린 뒤 9인조 밴드를 결성, 가요계에 복귀했다.

혼자서 기타를 연주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 초라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과거 미 8군에서의 화려한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4~20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화려한 사운드를 들려주지 않았던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럭저럭 6개월 정도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살 수는 있었다. 그즈음 또 다른 제의가 들어왔다. 오산 미군 K55비행장 앞의 송탄 기지촌이었다. 미 8군 오산비행장이 생겼을 때 송탄은 황무지였다. 오산 기지는 상당히 큰 부대였다. 당연히 음악에 대한 수요도 많았다. 거기서 일하던 한국 밴드 멤버들이 송탄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클럽을 열었다. 송탄은 음악인들이 정착해 살면서 점차 도시의 모습을 갖춰갔다. 거기서 활동하던 한 친구가 내게 연락을 한 것이다.

"어차피 여기는 미국인들만 드나드는 클럽이니 상관없을 거야. 조용히 와서 활동하게."

거기는 미 8군 영내처럼 대한민국 법이 통하지 않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만 상대하는 클럽이라 단속의 손길은 미치지 않았다. 오랜만에 밴드를 결성했다. 나와 함께 연주를 하고 싶어하던 젊은 친구들을 끌어모았다. 그 친구들이 나중에 방송국의 음악단장을 맡는 등 비중 있는 인물로 성장하기도 했다. 비밀리에 활동했기 때문에 밴드 이름도 없었다. 그렇게 해금될 때까지 4년을 버텼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유신 시절이 막을 내렸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신중현과 뮤직파워'를 구성했다. 세상이 달라졌으니 내 운신의 폭도 넓어지리라 생각해 연습에 들어갔던 것이다. 1979년 12월 연예활동 금지 조치가 일제히 풀렸다. 나 역시 자유의 몸이 됐다.

뮤직파워는 9인조 대형 그룹이었다. 혼(관악기) 섹션이 세 명이고 가수도 둘이나 됐다. 5년 만에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대통령 찬가 작곡을 거부하고 보란듯 작곡했던 '아름다운 강산'. 뮤직파워는 그 곡을 다시 힘차게 불렀다. 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이어졌다.

그 시절엔 나이트클럽이 성행했다. 뮤직파워로 활동을 재개했더니 모든 나이트클럽에서 스카우트 요청이 들어왔다. 다시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거금을 받고 대형 나이트 클럽 한 곳과 계약했다. 첫날 연주를 하는데 웨이터가 무대 앞으로 와서 손가락질을 해댔다.

"너무 느려서 춤을 못 추겠대요. 빠르게 좀 해주세요. 손님들 발이 음악에 안 맞잖아요."

어린 녀석이 손가락질을 해대며 음악 탓을 하니, 내 성질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계약상으론 매일 한 시간씩 공연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 시간을 채울 자신이 없었다.

"악기 싸라."

멤버들을 몽땅 데리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한동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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