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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건물도 무너뜨릴 '액상화'…포항 지진 후 100곳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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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진앙지 액상화…곡강천 주변 곳곳에서 확인돼

19일 오전 경북 포항시 흥해읍 일대 논에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관계자가 지진 영향으로 나타난 액상화 현상의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현장인 논에는 액상화로 물이 솟구치며 같이 올라온 모래가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연합뉴스]

19일 오전 경북 포항시 흥해읍 일대 논에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관계자가 지진 영향으로 나타난 액상화 현상의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 현장인 논에는 액상화로 물이 솟구치며 같이 올라온 모래가 남아있는 것이 보인다. [연합뉴스]

지난 15일 규모 5.4의 강진이 발생했던 경북 포항시 북구 일대 농경지에서 '액상화' 현상이 폭넓게 확인돼 정부가 정밀 조사에 들어갔다.
액상화(Liquefaction) 현상은 지진의 진동으로 인해 지하수와 토양 모래층이 뒤섞이면서 토양이 진흙탕처럼 물렁물렁해지는 등 지반이 약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액상화 현상이 나타나면 건물 붕괴 등 지진 피해가 훨씬 심하게 발생하게 된다.
한국교원대 경재복 교수는 19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포항 지진 진앙지 인근에서 국내 최초로 액상화 현상이 확인됐다"며 "현장 조사 결과, 포항시 북구 진앙지를 중심으로 2~3㎞ 내 농경지 100여 곳에서 액상화 현상의 흔적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경 교수는 17일부터 부산대 손문 교수 등과 함께 현장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 교수는 "포항시 북구의 곡강천 주변 여러 곳에서 흙탕물이 솟아오른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며 "지진 발생 당시 진앙 주변 논밭에서 진흙이 부글부글 끓으며 솟아올랐다'는 주민 증언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계속된 가뭄으로 말라있는 논에 지하수나 흙탕물이 솟아났기 때문에 액상화 현상이 뚜렷이 구별된다는 설명이다.

지하수와 퇴적층 섞여 흐물흐물해져 #지반 약화돼 건물 등 피해 더 커져 #포항 진앙지 주변 100여 곳에서 확인 #외국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현장조사팀도 지난 18일 포항 지진 진앙 주변의 지표 지질 조사를 통해 액상화 현상 때 나타나는 샌드 볼케이노(모래 분출구)와 머드 볼케이노(진흙 분출구) 30여 개를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날 진앙지 인근에서는 경 교수와 손 교수 등 대학연구팀 외에도 행정안전부 산하 활성단층조사팀, 지질자원연구원 등도 현장 를 진행했다.
기상청도 지진계 설치를 위해 진행하던 시추지역에서 토양 시료를 채취해 연구팀에게 제공하는 등 지원에 나섰다.
경 교수는 "진앙지 주변 전체 조사를 마쳐야 액상화 범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외국 사례에 비해 액상화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국내 처음 확인된 현상인 만큼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11·15 포항 지진(규모 5.4) 진앙 인근 논바닥에서 발견한 '샌드 볼케이노'(화산 모양의 모래 분출구). 지진 흔들림으로 땅 아래 있던 흙탕물 등이 지표면 밖으로 솟아오른 이른바 '액상화 현상' 가능성이 있다고 지질연은 19일 설명했다. [연합뉴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11·15 포항 지진(규모 5.4) 진앙 인근 논바닥에서 발견한 '샌드 볼케이노'(화산 모양의 모래 분출구). 지진 흔들림으로 땅 아래 있던 흙탕물 등이 지표면 밖으로 솟아오른 이른바 '액상화 현상' 가능성이 있다고 지질연은 19일 설명했다. [연합뉴스]

강변·해안지역 내진설계 보완해야
전문가들은 "외국 사례를 보면 강변이나 해안에서 액상화 현상 많이 나타나고 있다"며 "퇴적토 위나 해안 매립지 등에 세운 건물은 지진 발생시 액상화 현상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액상화 현상이 나타나면 지표면 위 건물이 일시적으로 물 위에 떠 있는 상태가 되는데, 이번 포항의 지진 피해가 규모에 비해 큰 것은 액상화의 영향 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진학자인 이기화 서울대 명예교수는 "액상화 현상은 해안지역 등 퇴적층이 있는 곳에 강한 지진이 일어나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진동이 커지면 압력에 의해 공극(지층의 빈 공간)을 채우고 있던 지하수가 분출되면서 토양과 섞이고, 결국 토양층의 강도가 약해져 흐물흐물해지게 된다"고 말했다.
경 교수는 "퇴적토 등 위에 건물을 지을 때는 건물 내진설계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15일 발생한 규모 5.4의 강진으로 인해 경북 포항시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18일 포항 지진 이후 진앙지인 포항시 흥해읍의 추수 끝난 논 곳곳에서 물을 댄 것처럼 땅이 젖는 액상화 현상 의심 사례가 발견됐다. 액상화 현상은 강한 지진으로 땅에 물이 차 오르는 것으로 지진의 충격으로 인해 땅 속 물, 모래, 점토층이 서로 뒤섞여 물처럼 솟구치는 현상이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5일 발생한 규모 5.4의 강진으로 인해 경북 포항시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18일 포항 지진 이후 진앙지인 포항시 흥해읍의 추수 끝난 논 곳곳에서 물을 댄 것처럼 땅이 젖는 액상화 현상 의심 사례가 발견됐다. 액상화 현상은 강한 지진으로 땅에 물이 차 오르는 것으로 지진의 충격으로 인해 땅 속 물, 모래, 점토층이 서로 뒤섞여 물처럼 솟구치는 현상이다. 프리랜서 공정식

서울과 부산도 안심할 수 없어
액상화 현상과 관련해 서울 등 수도권이나 다른 지역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경대 도시환경시스템공학과 최재순 교수팀이 지난해 9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등 수도권과 부산 지역도 액상화 위험지역이다.
최 교수팀이 경남 양산에서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액상화 위험도를 분석한 결과, 가까운 부산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과 수도권 상당 부분도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경기 파주에서 같은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상황을 가정했을 때도 수백㎞ 떨어진 부산도 액상화 위험이 높은 지역으로 분류됐다.
전문가들은 서울 강남지역 역시 한강의 모래와 자갈이 쌓여서 만들어진 충적층 지역인 만큼 주변에 강한 지진이 발생하면 상당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충적층이 액상화 현상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지난 15일 발생한 규모 5.4의 강진으로 인해 경북 포항시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18일 포항 지진 이후 진앙지인 포항시 흥해읍의 추수 끝난 논 곳곳에서 물을 댄 것처럼 땅이 젖는 액상화 현상 의심 사례가 발견됐다. 액상화 현상은 강한 지진으로 땅에 물이 차 오르는 것으로 지진의 충격으로 인해 땅 속 물, 모래, 점토층이 서로 뒤섞여 물처럼 솟구치는 현상이다. 논 흙과 다른 고운 흙이 논바닥에 곳곳에 나타났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5일 발생한 규모 5.4의 강진으로 인해 경북 포항시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 18일 포항 지진 이후 진앙지인 포항시 흥해읍의 추수 끝난 논 곳곳에서 물을 댄 것처럼 땅이 젖는 액상화 현상 의심 사례가 발견됐다. 액상화 현상은 강한 지진으로 땅에 물이 차 오르는 것으로 지진의 충격으로 인해 땅 속 물, 모래, 점토층이 서로 뒤섞여 물처럼 솟구치는 현상이다. 논 흙과 다른 고운 흙이 논바닥에 곳곳에 나타났다. 프리랜서 공정식

중국 탕산대지진도 액상화 탓에 큰 피해

1964년 일본 니카타에서는 지진으로 인해 아파트 등 건물이 기울어지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액상화 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에 앞서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에는 진흙이 분출하는 현상이 관측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경우 갯벌을 매립한 곳에 도시가 들어선 탓에 지금도 액상화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갯벌 외에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유입되는 만(灣)이기 때문에 지진과 액상화 현상에 취약한 상태다.
1976년 중국의 탕산(唐山) 대지진 역시 액상화 탓에 피해가 커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시 탕산시의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시 면적의 4배인 2400㎢ 이상의 면적에서 심한 액상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24만2000명이 사망하고, 16만4000명이 중상을 입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에서도 1985년 지진 때 액상화 현상과 퇴적층에 의한 진동 증폭 현상 탓에 피해가 컸다. 멕시코시티는 호수를 매립해서 건설된 도시다.

17세기 한반도에서도 액상화 현상 관측
국내 지진관측 사상 공식적으로 액상화 현상이 발견된 것은 이번 포항 지진이 처음이지만, 기상청이 발간한 '한반도 역사지진 기록' 자료집을 보면 과거 역사서에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인조 21년인 1643년 5월 "부산 동래 쪽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고, 경상도 합천의 초계에서는 마른 하천에서 탁한 물이 솟아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또 같은 해 6월에도 "경상도 진주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합천군의 마른 샘에서 흙탕물이 솟구쳐 나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같은 해 7월에는 "울산에서 지진이 발생했는데, 마른 논에서 물이 샘처럼 솟았고, 물이 솟아난 곳에 각각 흰모래가 나와 1~2말이 쌓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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