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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장애인들, 포항 지진 대피소에 행복바이러스 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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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밥차’ 자원봉사자들이 지진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해 18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빨간 5t 트럭을 세우고 시민들을 응원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사랑해 밥차’ 자원봉사자들이 지진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해 18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빨간 5t 트럭을 세우고 시민들을 응원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 최영진(60)씨, 군대에서 훈련 중 사고로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종용(58)씨, 공장에서 일하다 오른쪽 엄지를 잃은 이순조(72)씨….

시각·청각 장애인, 국가 유공자 등 장애인과 봉사자 20여 명 #17일 오전 대피소인 포항 환호여중에서 '사랑해 밥차' 운영 #이재민 100여 명 위한 소고기 국밥 준비…"먹고 꼭 힘내길" #

저마다 다른 장애를 가진 10여 명과 경찰관 등 자원봉사자 20명이 지난 17일 오전 8시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운동장으로 모였다. 환호여중은 앞서 15일 포항 지진으로 70여 명의 이재민이 모였던 대피소다. 빨간 5t 트럭을 몰고 온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트럭에서 무·배추 등 짐을 뺐다. 추운 날씨 탓에 목장갑, 고무장갑을 두 세 개씩 꼈다.

환호여자중학교에서 이재민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 중인 시각장애 3급 서정한(66)씨. 백경서 기자

환호여자중학교에서 이재민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 중인 시각장애 3급 서정한(66)씨. 백경서 기자

이들은 '사랑해 밥차' 회원들이자 봉사단체 '행복나눔봉사단'과 '금복주'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다. 대구에서 14년간 밥차를 운영해온 밥차 베테랑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난해 경주 지진 때도 대피소인 내남면 마을회관에서 밥차를 운영했다. 당시엔 뷔페식으로 100인분의 점심을 차렸다. 이번엔 17일 점심·저녁, 18일 점심 등 이틀간 총 500인분의 음식을 마련했다.

최영진 단장을 비롯한 ‘사랑해 밥차’ 자원봉사자들이 18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빨간 5t 트럭을 세우고 지진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최영진 단장을 비롯한 ‘사랑해 밥차’ 자원봉사자들이 18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운동장에 빨간 5t 트럭을 세우고 지진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위해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단장을 맡은 시각장애 5급 최영진(60)씨는 "경주 지진때 힘들어했던 이재민들을 본 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다만 오늘 우리 밥을 기다리는 700명의 어르신들이 눈에 밟힌다"고 말했다.

'사랑해 밥차'는 2004년 3월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길거리에서 사물놀이, 통기타 등의 공연을 하던 '사랑해장애인예술단' 소속 회원 5명이서 마음을 합쳤다. 당시 한 달간 공연을 해서 번 수익은 30만원. 모두 이 돈을 밥차 운영에 쓰는데 동의했다.

2015년 대구 서부정류장 한켠에서 '사랑해 밥차'가 하는 무료급식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2015년 대구 서부정류장 한켠에서 '사랑해 밥차'가 하는 무료급식에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처음에는 2.5t 트럭으로 밥차를 운영했다. 공연을 해야 수익이 나와 밥을 제공할 수 있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2009년에서야 BC카드사가 후원하고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공모한 '사랑해 밥차' 사업에 선정돼 주방시설을 갖춘 지금의 빨간 밥차를 받았다.

현재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점심때마다 대구 지역의 공원 등을 찾아 어르신 700명에게 밥차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 이날 오전 내내 최단장의 휴대전화에서 "언제 오느냐"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최 단장은 "오늘은 이재민들을 도우러 왔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랑해 밥차가 준비한 소고기 국밥. 백경서 기자

사랑해 밥차가 준비한 소고기 국밥. 백경서 기자

이날 메뉴는 소고기국밥이었다. 직접 만든 김치, 깍두기도 있다. 음식은 대구에서온 행복나눔봉사단 회원 5명이 만들었다. 이들은 10년째 사랑해 밥차와 함께하고 있다.
구미란(60) 행복나눔봉사단 회장은 "아무래도 춥고 체력도 떨어질 것 같아서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소고기국밥을 만들었다"며 "오늘은 베테랑 요리사들만 불렀다"며 웃었다.

야간근무를 마친 경찰관 김종기(47) 대구 남부경찰서 교통안전계 경사도 일손을 도왔다. 그는 3년 전부터 밥차에 합류했다.
함께 온 아내 정미현(48)씨는 "야간근무가 끝나면 좀 쉬어야 하는데, 늘 밥차로 달려간다. 이날도 오전 6시 근무 끝나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사랑해 밥차를 돕는 김종기 대구 남부경찰서 교통안전계 경사와 아내 정미현씨. 백경서 기자

사랑해 밥차를 돕는 김종기 대구 남부경찰서 교통안전계 경사와 아내 정미현씨. 백경서 기자

'참소주'를 만드는 주류회사 금복주에서도 직원 20명이 일손을 도왔다.
류연수(51) 팀장은 "바로 옆 동네 아니냐"며 "밥차 측에서 도와달라 연락이 왔길래 달려왔다"고 했다.
사내 참사랑봉사단 단장인 송상수(71)씨는 "대구에서 원래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 오늘은 이재민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왔다"고 말했다.

사고로 엄지손가락 한 마디를 잃은 이순조씨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사고로 엄지손가락 한 마디를 잃은 이순조씨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이날 낮12시까지 점심식사 120인분을 준비하는 내내 운동장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국밥이 끓는 동안 수다판도 벌어졌다.
이순조(72)씨는 "사실 한 마디가 없는 엄지 손가락이 좀 시리긴 하다"며 "겨울에만 그렇다. 봉사 활동하다 보면 다 잊는다"고 웃었다. 다들 "봉사활동을 하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환호여자중학교에서 한 학생이 한 손에 붕대를 한 채 국밥을 먹고 있다. 백경서 기자

환호여자중학교에서 한 학생이 한 손에 붕대를 한 채 국밥을 먹고 있다. 백경서 기자

이들의 행복바이러스는 대피소까지 전달됐다. 이날 환호여중 대피소에 있던 70여 명의 이재민이 국밥을 먹었다. 다른 대피소에서도 30여 명의 사람이 추가로 왔다.
지난 15일 지진 이후 3일째 대피소에 있는 김가연(10)양은 "음식이 하나도 짜지 않고 맛있다"며 "정성을 담아서 만들어 주셔서 그런지 힘이 난다"고 고마워 했다.

최영진(오른쪽 두번째) 단장을 비롯한 ‘사랑해 밥차’ 자원봉사자들이 18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지진 피해 이재민과 의용소방대원들에게 점심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최영진(오른쪽 두번째) 단장을 비롯한 ‘사랑해 밥차’ 자원봉사자들이 18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환호동 환호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지진 피해 이재민과 의용소방대원들에게 점심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사실 14년간 밥차를 운영하면서 오해도 많았다고 한다. 시나 구청에서 지원받는 돈으로 밥차를 운영하면서 왜 이렇게 맛이 없느냐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다. 시각장애 3급인 서정환(66)씨는 "실제 시나 구에서 지원받는 금액은 거의 없다. 예전엔 반찬 투정을 하는 어르신들이 좀 있었지만, 지금은 다들 아시니 감사 인사를 꼭 해주고 가신다"며 웃어 보였다.

작은 고민도 있다. 내년이면 이 차량도 10년째다. 이제 노후 경유차 정기검사를 6개월마다 받아야 한다. 최 단장은 "거의 매일 밥차를 운영하고, 쉬는 날엔 또 공연을 해야 하니 노후 차 관리에 대한 고민도 크다"고 말했다.

포항=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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