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38. 활동금지 여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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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금지는 음악인인 필자의 생명줄을 끊어버렸다. 사진은 기타 연주에 몰입한 젊은 시절의 필자.

레코드사 사장들도 나를 외면했다. 나의 음악 덕분에 돈방석에 앉았던 그들이건만, 한 푼도 도움을 주려하지 않았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식구들이 굶고 있으니 쌀값이라도 보태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말이다. 내가 스타급 매니저로 길러줬던 한 친구가 있었다. 하도 상황이 절박해 그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했다.

"제가 쌀이라도 좀 보내드리겠습니다."

큰 소리를 치고 가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두어 달 그런 일과 숱하게 부딪히다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술병만 붙들고 있었다. 비참하고 괴로웠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아내에게 괜히 소리까지 질러댔다.

"당신이라도 어디 가서 돈 좀 구해와!"

그렇다고 아내가 어디서 돈을 빌릴 데나 있겠는가. 그저 홧김에 구박을 했던 게다.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이 미어진다. 아내에게 큰 상처가 됐을테니….

그렇게 절망으로 치닫던 시절, 누군가가 내 악기를 사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좋은 악기와 장비를 많이 갖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샬 앰프도 당시 국내에선 나만 갖고 있었다. 요즘 나오는 마샬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좋은 것이었다. 팔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급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내 처지를 알고 있는 그는 야비하게 말도 안 되는 헐값을 불렀다.

"알았으니 돈이나 내고 가져가시오."

그런 식으로 악기를 하나씩 팔아치웠다. 아내는 집은 팔았어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악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었다. 나도 식구들도 모두 심란해졌다. 음악은 내 모든 것, 내 생명인데 '활동금지'란 조치가 나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낚싯대를 벗삼아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낚시터에 나가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저녁에 되돌아 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바늘구멍만한 희망조차 없었다. 조그마한 빛줄기라도 보여야 방향을 잡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 타락 직전까지 갔다. 그러던 어느날 방구석에 박혀있던 '장자'가 눈에 띄었다. 무위자연…. 모든 걸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사상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명예욕과 물욕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천하도 얻을 수 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커다란 암시가 그 책에 들어 있었다.

모든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집착하면 괴롭지만 버리면 편안해지는 것. 욕심이 남아 괴로울 뿐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금씩 마음을 잡게 됐다. 그러던 중 미 8군에서 연락이 왔다. 클럽 책임자였다.

"요즘 뭐 하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할 게 없어 가만히 있지 뭘 하겠습니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미 8군에 들어와서 음악을 하시죠. 우리가 보호해줄게요. 어차피 여기는 대한민국 영내가 아니니 활동금지랑도 상관없고…."

"그런데 이젠 같이 음악 할 사람도 없는데…."

혼자라도 좋다고 했다. 급히 기타 하나 들고 그리로 갔다. 출소하고 1년쯤 흐른 1977년 초였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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