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시절 자신의 비서관들이 한국e스포츠협회 자금 유용 혐의로 구속된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이 10일 국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7일 e스포츠협회 사건에 대한 첫 언론 보도 이후 사흘 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난 셈이다. 7일 청와대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환영만찬 초청 대상이었지만 불참했던 전 수석은 10일 국회(예산결산특위 회의) 부름에는 어쩌지 못했다. 예결위 회의 정회 도중 중앙일보 기자와 만난 전 수석은 거취를 둘러싼 물음에 굳은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 비서관들이 오늘 구속됐는데 이에 대한 입장은.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음)
- 검찰이 비서관들에게 제3자 뇌물 혐의를 적용했던데 정치권으로 수사가 넘어올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잘 모르는 일이다.”
- 청와대에서 정치적 부담을 가질텐데 거취에 대한 고민은.
“…”
옆에 있던 정무수석실 관계자가 “다음에 하시죠. 저희 입장은 저번에 발표한 그대로”라며 양해를 구했다. 기자가 “불법 개입한 적 없다는 기존 입장에 바뀐 것 없느냐”고 묻자 전 수석은 “수고하세요”란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예결위에서 전 수석은 의원들 질의에 거침 없이 답변하던 평소 때와 다소 달랐다. 목소리 톤은 낮았고 답변을 하다 질의가 다시 들어와 말이 끊길 때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시종 로우키를 유지했다. 전 수석은 “장관급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명의의 공문을 사회부총리에게 보내 ‘적폐청산TF’ 구성을 지시하는 것은 직권남용”이라는 이장우 자유한국당 의원 지적에 “‘지시’ 공문이 아니라 ‘협조요청 공문’이었다”면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공문서 남발은 자제하겠다”고 몸을 낮췄다. 이 의원은 질의 과정에서 국정원 댓글 수사 방해 의혹과 관련해 수사선상에 올랐던 고(故) 변창훈 검사 자살과 관련해 “이 정부가 죽인 것”이라고 주장해 여당 의원들의 반발을 샀다.
전 수석 거취는 이날 대통령 비서실 예산심의를 위해 열린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도 거론됐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전 수석이) 정권에 부담주는 면이 있는데 대승적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느냐”는 민경욱 한국당 의원 질의에 “아직 예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무수석은 관련성에 대해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 실장은 이번 사건이 전 수석과 청와대 내 ‘86 출신’ 실세들의 갈등에서 불거진 것 아니냐는 물음에는 “그럴 리가 있느냐”고 했다.
전 수석은 결백을 호소하고 있지만 여권에선 검찰 칼끝이 전 수석을 향하고 있다는 관측이 많다. 율사 출신 더불어민주당 한 의원은 “처음부터 검찰 타깃은 전 수석”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초동 검찰청을 향한 여권의 시선과 속내는 사뭇 복잡하다. 우선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사전에 검찰 수사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나온다. 민주당 한 의원은 “청와대 핵심 관계자와 얘기를 나눴는데 ‘형님, 우리가 솔직히 검찰에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과거 대검→법무부→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이어지는 지휘보고 채널인 ‘서초동 파이프라인’이 현 정권에선 아예 폐쇄됐다는 얘기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이번 일을 “검찰의 반격”이라고 해석했다. 이 의원은 “전 수석 사건은 이미 예전에 돌았던 소문인데 검찰이 캐비넷에서 다시 꺼낸 것 아니냐”며 “적폐 수사 과정에서 변 검사 자살로 검찰 내 반발이 들끓자 현 정부 인사들을 엮어 구색맞추기 수사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여당은 검찰 수사로 여권도 적잖은 유탄을 맞을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익명을 원한 한 민주당 의원은 “검찰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청와대에 여러 번 얘기를 해왔는데 청와대는 ‘걱정말라’고 하다가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여권에선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대한 피로감이 조금씩 커지는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형구ㆍ채윤경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