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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추적]"비트코인으로 15억 벌겠다"며 가출한 50대에 이혼 선언한 아내

중앙일보

입력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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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에서 작은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김모(59)씨는 지난 7월 가출했다. 암호화폐인 '비트코인'에 미쳐서다. 부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만 집에 남겨둔 채다.부인 김모(49·여)씨는 7일 중앙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비트코인 투자로 15억원을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갔다"고 말했다.

일감 떨어진 건설업체 문 닫고 #비트코인 투자대행업체 1억 투자 #지인 100여명, 수십억 끌어들여 #부인이 "다단계사기"라고 말리자 #고교생 자녀 둔 채 7월 집 나가 #경찰 수사로 업체 사기 행각 드러나 #업체 대표 구속, 5명 불구속 입건 #부인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청구할지 무섭다"

암호화폐는 각국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일반 화폐와 달리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전자화폐의 일종이다. 인터넷상으로만 거래되는 비트코인이 대표적이다.

남편 김씨는 지난 5월 후배 유모(48)씨로부터 서울에 있는 한 비트코인 투자 대행 업체를 소개받았다. 파나마에 본사를 둔 업체라고 했다. 김씨는 이 업체가 연 투자 설명회에서 "한 계좌당 130만원을 투자하면 300일 뒤 180%의 고수익을 보장하고, 투자자를 데려오면 추가로 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열린 '네오토피아: 데이터와 휴머니티' 전시회에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을 이용한 설치 작품이 전시됐다. [연합뉴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아트센터나비에서 열린 '네오토피아: 데이터와 휴머니티' 전시회에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을 이용한 설치 작품이 전시됐다. [연합뉴스]

속칭 '지점장'이라 불리는 사람은 "달러화 등 기존 화폐의 시대는 갔다. 비트코인의 시대가 왔다. 2009년 비트코인 하나 가격이 1센트에서 현재 7000달러로 올랐다. 비트코인 값은 계속 오를 거다. 세계적인 투자회사들도 비트코인에 투자한다"며 유혹했다.

가뜩이나 지난 겨울부터 회사에 일감이 준 터에 김씨는 일단 1300만원을 투자해 계좌 10개를 만들었다. 실제 몇 달 만에 업체 설명대로 수익이 생기고 투자자 모집 수당도 받자 김씨는 부인 몰래 1억원을 지인들에게 빌려 해당 업체에 맡겼다.

김씨는 아예 지난 5월 본인 회사 문을 닫고 비트코인 투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닥치는 대로 주변 사람들을 '하위 투자자'로 끌어들였다. 업계 사람들부터 경영대학원 선·후배, 취미 모임 회원 등 만나는 사람마다 비트코인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직업도 건설사 대표부터 교수·식당 주인 등 다양했다. 부인 김씨는 "처음엔 (비트코인 투자 대행 업체에서) 돈을 잘 주니 너도 하고, 나도 하는 식으로 투자했다"며"남편뿐 아니라 투자를 권유하는 사람 상당수가 지역에서 60대 안팎의 오피니언 리더(여론 주도층)이다 보니 '설마 먹튀(먹고 튀기)를 하겠냐'며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남편은 투자 설명회에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까지 책임지고 이후엔 '지점장'이 붙는 식이었다"며 "남편이 이런 식으로 끌어들인 투자자가 100여 명, 투자금만 수십억원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부인 김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불법 다단계를 왜 하느냐"고 남편을 뜯어말렸다고 한다. 비트코인 전문가 등 여러 루트를 통해 남편이 투자금을 맡긴 회사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하지만 남편 김씨는 외려 "이렇게 쉽게,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좋은 회사가 어디 있느냐"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부부싸움은 잦아졌고, 급기야 남편 김씨는 석 달 전 집을 나가 연락을 끊었다.

비트코인 국내 거래소별 점유율. [자료: NH투자증권]

비트코인 국내 거래소별 점유율. [자료: NH투자증권]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부인 김씨는 최근 전북 익산경찰서에서 전화 한 통을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 김씨가 사활을 건 비트코인 투자 대행 업체 대표 장모(60)씨가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같은 혐의로 이 회사 간부 이모(50)씨 등 5명이 불구속 입건됐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장씨 등은 서울과 전주 등 전국에 60개 지점을 개설해 비트코인 투자를 미끼로 지난 2015년 9월부터 최근까지 3916명으로부터 387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다. 피해자들은 김씨처럼 가상화폐의 개념을 정확히 모른 채 투자한 중·장년층이 많았다.

김씨는 "남편이 투자금을 잃은 것보다 그 사람이 끌어들인 투자자들이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거나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지 않을까 더 겁난다"며 "남편과는 이혼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에스트레뉴 빌딩에 문을 연 가상화폐 오프라인 거래소 코인원블록스에서 대형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월 1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에스트레뉴 빌딩에 문을 연 가상화폐 오프라인 거래소 코인원블록스에서 대형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익산경찰서는 지난 6월 "비트코인 관련 투자 설명회에 갔는데 다단계 사기 같다"는 제보를 받고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장씨와 직접 계약서를 쓴 이사와 지점장 등 간부 5명을 '피의자'로 입건하는 대신 압수한 계좌에 돈을 입금한 사람 가운데 이들 간부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피해자'로 추렸다.김씨처럼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투자를 권유한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취지다.

경찰 조사 결과 장씨 업체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른바 '페이퍼 컴퍼니'였다. 투자자들에게는 "비트코인을 채굴한다"고 홍보했지만 정작 장씨 등은 그 업체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파나마에 있다는 본사도 실체가 불투명했다.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비트코인 이미지. [중앙포토]

경찰에 따르면 장씨 등은 투자금을 받으면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을 산다고 했지만 대개는 거래소를 이용하지 않고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비트코인을 넘기고 투자금만 챙기는 꼼수를 부렸다.

경찰은 장씨 등이 전국 60개 지점에서 투자자를 모은 점에 비춰 추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노승섭 익산경찰서 지능팀 경위는 "수익모델이 없는데도 높은 수익과 원금을 보장한다며 투자자를 모으는 경우는 불법 다단계 사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익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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