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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선칼럼] 관악산의 봄, 한반도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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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오늘의 관악에서 '인식'을 더 이상 찾아보기는 어렵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역사의 주인공과 무대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가운데 2000년대의 대부분 젊은이는 더 이상 경직화한 민족과 민중의 투쟁 얘기에 80년대와 같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80년대의 젊은이들이 2000년대 현실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일단 받아들인 인식과 언어는 변화하는 현실을 제대로 담기 어려워도 쉽사리 버리기 어렵다. 80년대의 인식과 언어로 2000년대의 변화를 읽어내고 혁신의 방향을 찾아보려는 무리함을 우리는 청와대의 말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열변에서, 신문과 방송의 기사와 프로그램에서, 그리고 영화의 화면에서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

최근 출판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서점가에서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편집자의 한 사람인 박지향 교수는 머리말에서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이 우리 역사 인식에 끼치는 폐해를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인식'이 80년대의 제비였다면 '재인식'은 2000년대의 제비로 봄을 알리려 날기 시작했다. '재인식'은 '인식'의 운명을 반복하지 않고 2030년 이 땅의 역사학자들에게 또 한 번 '직무유기'의 비애를 느끼지 않도록 날 수 있어야 한다.

'재인식'이 그런 길을 찾으려면 단순히 '인식'과의 대결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인식'과 '재인식'을 동시에 품고 전개되는 '세계사 속의 한국현대사 새 인식'(이하 '새 인식')을 찾아 나서야 한다. 2030년 세계사의 전개를 한반도의 입장에서 제대로 읽으려면 복합사의 안목을 하루빨리 키워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벌어질 민족국가들의 힘의 각축은 이 지역 20억 인의 삶과 죽음, 번영과 빈곤에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민족국가라는 주인공 이외에 새롭게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는 지구조직, 지역국가, 지방단체, 시민사회조직, 그리고 개인의 그물망이다. 국제관계와 그물망 관계를 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이상 21세기의 역사 무대에 설 수 없다. 힘의 내용도 복합적이다. 전통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지식력.문화력.환경력.국내외 조종력을 품는 매력을 새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2030년 무대의 주인공들은 이런 복합적 안목에서 자기 역사를 새롭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주체와 협력적 자주의 얘기나 탈식민과 탈근대의 얘기는 잊힌 전설이 될 것이다.

'인식'은 민족과 민중만의 날개로 하늘만 보고 날아오른 탓에 땅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변화를 놓치고 역사의 지각생이 됐다. 이제 막 날기 시작한 '재인식'이 전하는 관악의 봄소식이 '인식'이 전했던 관악의 봄소식과 같은 운명을 겪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인식'과 '재인식'이 함께 날아올라서 21세기 한반도의 진짜 봄소식을 전할 수 있는 '새 인식'과 '새 얘기'를 찾아 나서야 한다. 제대로 된 복합 모델하우스를 미리 마련하고 힘을 합쳐 이 땅에 개인.민족.지구가 함께 어우러지는 복합건물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는 세계가, 그리고 동아시아가 부러워하는 2030년의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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