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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암도 이겼는데, 구직·복직은 막힌 암 환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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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방암 환자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청년일자리센터에서 구직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조문규 기자]

유방암 환자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청년일자리센터에서 구직 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조문규 기자]

대장암(직장암) 3기 환자 윤모(49·충남 천안시)씨는 지난 8월 수술을 받았고 곧 항암 치료를 시작할 예정이다. 현재 장루(인공항문) 주머니를 차고 있다. 윤씨는 인터폰 설치기사다. 암 진단 후 일을 중단했다. 일을 알선하는 업체에 발병 사실을 숨겼다. 윤씨는 “암 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고 여겨 업체가 일을 안 줄까봐 불안하다. 가족 외에는 일절 알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의술 발달, 70%가 5년 넘게 살지만 #회사 측선 “아픈 사람” 사직 압박 #암 발병 회사에 안 알리고 치료도 #암 경험자 맞춤형 구직 서비스 필요

암 치료 중이거나 끝난 사람이 실직 공포와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암 환자의 70%가 5년 넘게 산다. 2015년 말 현재 암 생존자는 146만 명. 박종혁 충북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의료기술의 발달로 암 생존자가 계속 늘고 있지만 복직과 구직의 장벽이 견고하다”고 말했다.

암 환자는 거액의 치료비를 대느라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서울대병원 암통합케어센터 윤영호 교수팀이 2014년 폐암 경험자 829명의 발병 전후 고용 변화를 조사했더니 발병 전 569명이 일자리가 있었으나 치료 후 322명(43%)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권고사직 압박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백혈병 환자가 환자협회 상담 코너에 올린 하소연이다.

“가끔 얼굴에 부종(붓는 증상)이 생기는 것 말고는 직장 생활에 지장을 줄 만한 문제가 없어요. 상사가 부은 걸 보더니 ‘아픈 사람에게 일 시키기 힘들다’며 권고휴직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병도 서러운데 직장(17년)까지 그만두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요.”(호서대 사회복지학부 이인정 교수 발표 논문)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여성 암 환자도 절반 정도 일자리를 잃는다. 서울대병원·국립암센터·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 연구진이 2013년 자궁경부암 치료를 마친 858명을 조사한 결과, 일이 있는 사람이 발병 전 424명에서 233명(45%)으로 줄었다.

직장맘 환자는 이중고를 겪는다. 유방암 환자 김모(44·여·경기도 수원시)씨는 부분 절제 수술을 받고 복직했다. “암 핑계 댄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회사·집에서 더 악착같이 일한다. 김씨는 항호르몬제 치료약을 복용하면서 신체 균형이 깨져 감정 기복 같은 갱년기 증상에 시달린다. 그는 “주변에서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가족도 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고 토로한다.

암 경험자 사회 복귀의 가장 큰 걸림돌은 업무 능력 불신이다. 충북대병원·국립암센터가 지난해 성인 남녀 2000명을 설문조사 했다. ‘암 통증으로 직업 능력이 떨어진다’는 질문에 응답자의 70.4%가 동의했다. 서울대병원 의료사회복지팀 이민경 사회복지사는 “암 환자들은 편견이 무서워 병력(病歷)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기업은 재발 우려 때문에 선뜻 채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의사가 ‘업무 능력에 지장이 없다’는 소견서를 써주지만 통하지 않는다.

한 중소기업 인사담당자는 “이왕이면 아픈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을 뽑고 싶다. 생산직이면 더 그렇다”며 “암 경험이 있다고 얘기하면 한 번 더 고려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영희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사무국장(공인노무사)은 “고용정책기본법에 병력을 이유로 채용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돼 있지만 벌칙·과태료가 없어 위반해도 처벌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새 일을 구하기는 더 힘들다. 유방암 환자 이모(30·경기도 군포시)씨는 잦은 외근·야근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뒤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체력 부담이 덜한 일자리를 찾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한국에는 암 경험자의 직업 재활이나 직업 훈련, 구직 정보 제공 시스템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미국의 경우 암 환자가 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다. 전미선 아주대병원 암통합지지센터장은 “암 경험자가 구직을 원할 경우 체중이 많이 빠졌으면 영양 상담을,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면 심리 치료를, 스트레스가 많으면 정신과 상담을, 새 일을 구하면 취업 상담을 연결하는 식으로 맞춤형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삼성서울병원은 최근 암 환자 복직 안내서에서 “직장에 복귀 계획을 미리 알리고 동료·상급자와 자주 만나며, 운동량과 시간을 서서히 늘려 체력을 키우고, 균형 잡힌 식습관을 유지할 것”을 주문했다.

김선영 기자 kim.sun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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