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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가져온 것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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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호 34면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여행세계문화사전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고난)’이다. 여행이 고통이나 고난이 아닌 쾌락이나 오락으로 여겨지게 된 건 교통수단이 발달하게 된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여자의 사전
그 여자가 지난 한 해 동안 집중적으로 몰두해본 것.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화에 기대를 걸어봤으나, 들인 돈에 비해 발견한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 드는 것.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또 비행기를 탔다. 도쿄와 LA를 거쳐 쿠바에 다녀왔다. 한 해 동안 벌써 네 번째 여행이었다. 그동안은 유난히 긴 연휴가 많았던 시기였기도 하지만 배낭여행 한 번 못해본 젊은 날을 더 늙기 전에 집중적으로 보상하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때였던 것 같다.

왜 쿠바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음악이 넘쳐나고 색깔이 넘쳐나고 혁명의 자부심이 가득한 풍부한 콘텐트를 가진 곳, ‘스타벅스와 맥도널드가 들어오기 전에’ 가야 하는 곳 같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냥 남들이 그래도 덜 가는 곳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분명 있었다.

목적지의 희귀성으로 여행자의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은 도착하자마자 깨졌다. 쿠바에는 한국 여행자들이 많았다. 사실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대책없이 나선 여행길에 엄청난 고생을 할 뻔했지만, 그래도 김이 빠졌다.

올드카와 낡은 주택들이 만들어내는 알록달록한 거리의 이미지는 사진에서는 근사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불편했다. 큰 맘먹고 하루 묵은 휴양지 특급 호텔에서도 허리케인 여파 때문인지 곰팡이 냄새로 잠이 들기가 힘들 정도였다. 인터넷 중독인 나로서는 접속을 하기도 힘들고 접속했다 해도 에어비앤비나 호텔 예약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평소 같은 무작정 여행을 하기 힘든 환경에 좌절했다. 캐리비안의 해변은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닷물과 뭉게구름이 그림 같았지만, 마침 우기에 극성을 부리는 모기들 때문에 바닷가 모래밭에 10분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가장 힘든 건 삐끼들의 공세였다. “Where are you from?”말을 걸기만 하면 꼭 어디론가 사람을 끌고 가서는 바가지를 씌웠다. 날씨마저 너무 더워 체력은 금방 떨어졌고 몇 시간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선 실망감 때문에 울고 싶었다.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지. 여행을 다니면 그동안 몰랐던 ‘나’에 대해서도 깨닫고 한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멋지게 쿠바를 즐기며 블로그도 쓰고 책도 쓰고 그러던데. 나는 왜 여행에서 깨닫는 나에 대한 발견이라곤 ‘내가 싫어하는 것 혹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예를 들면 창문 없는 방에서 묵는 일. 곰팡이 냄새. 사람들의 거짓말’ 같은 것밖엔 없을까.

무엇보다 여행을 온 이유는 낯선 곳에서 하루하루를 온전히 내가 행복해지는데 바치겠다는 목표였는데. 나는 여전히 길을 잃고 같은 거리만 수십 번 헤매는 나, 살사 음악에 춤 한번 신나게 못 추는 쑥스러운 나, 더 열심히 여행 준비를 해오지 못한 나를 탓하고만 있었다.

결국은 초조함 때문이었다. ‘언제 여기를 다시 올지 모르는데’ 빠뜨리지 않고 최대한 경험하고 구경해야 한다는, 그리고 누구에게도 속지않고 가성비를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여행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여기까지 와서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시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래, 바가지 써봐야 1~2만원 더 쓰는 것이고, 무엇을 못 본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마음을 바꿔 먹고 나니 달리 보였다. 비에 젖은 채 식당에 들어섰는데 생각해보니 돈이 모자라 “환전소부터 다녀와야겠다”는 내게 괜찮다며 안심시켜주던 식당 아저씨, 재즈 클럽에서 만나 집까지 비싼 택시를 태워주며 웃어주던 미국 여행자, 말도 통하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길만 물어보면 꼭 끝까지 와서 확인시켜주던 사람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실제 무대였던 작은 어촌의 허물어진 선착장에서 낚시질에 몰두하던 소년들을 바라보며 넋 놓고 않아 있던 30분의 시간, 공원에서 턱을 마구 들이밀며 쓰다듬어 달라던 네 마리 강아지들, 밥을 먹던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아무리 밀어도 내려가지 않던 길고양이들…. 쿠바와 함께 흐뭇한 기억으로 오래 간직할 사람과 풍경들이다. 이제야 나는 욕심부리지 않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행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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