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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와 지리 모이는 인화가 곧 시대정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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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호 28면

이호영의 동양학 가라사대

4세기께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의 벽화. 장보(章甫) 혹은 책관(??冠)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 은(殷)나라와 고구려는 밀접한 종족이었다.

4세기께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의 벽화. 장보(章甫) 혹은 책관(??冠)을 쓰고 춤을 추는 모습. 은(殷)나라와 고구려는 밀접한 종족이었다.

장자(莊子)는 친구 혜시(惠施)를 빗대 이런 말을 했다. “송나라 사람이 은나라 모자(章甫)를 월(越)나라로 팔러 갔다. 하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장자다운 비꼼이다. 『맹자(孟子)』에는 “하늘의 때(天時)는 지형적 이점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사회적 화합(人和)만 못하다”고 하였다. 손빈(孫臏) 역시 이를 병법의 기본으로 여겼다.

만약 현재가 유신독재시대라면 당연히 ‘인화’를 ‘총화단결’로 해석해야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장자와 맹자가 강조하는 바는 단결이 아닌 지식(知識)이었다. 하늘은 때로 말하고, 땅은 지세로 말하고, 사람은 화합으로 말한다. 세계의 변화를 알아듣는 눈과 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지식의 문제이기에 평소에 명민하던 사람이라도 이를 놓치면 아둔해진다.

천시란 순서대로 변하는 사시사철이다. 달리 사주(四柱)나 정해진 운명(運命)이라 한다. 나라에도, 개인에게도 나름대로 흐름과 순서가 있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듯 우리는 천시를 보고 앞날을 예측하고 대비한다.

지리라는 말은 우리가 겪는 국제적 곤경으로 드러난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낀 우리의 처지와 북핵이 그렇다. 도무지 지리적 이점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위치로만 보자면 한반도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화약고 중동과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다르기에 우리는 다르다.

‘인(人)’은 ‘민(民)’과 다르다. 그리고 ‘화합(和)’은 ‘일사불란(同)’이 아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고대 중국어에서 ‘민’이란 노예나 다름없이 일만 하는 개미이지만 ‘인’은 자율성을 자각한 자유시민이다. ‘동’은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한 집단적 움직임이지만, ‘화’란 자율적인 합의다. 즉 ‘인화’란 자유인의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합의를 뜻한다. 따라서 민의를 알아야 지혜롭다고 할 수 있다.

지난 겨울 우린 큰 정치적 변혁을 거쳤다. 인화로 만들어 낸 변화였기에 하늘이 바뀌면서 나라의 일정이 압축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5월에 앞당겨 실시됐다. 근 일 년이 걸릴 과정은 3개월로 줄었다. 급작스레 몰아친 정치적 태풍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시계가 꼬였다. 순차적이던 계절이 단계를 뛰어넘으면서 겨울용 패딩으로 맞추어 두었던 세일즈 일정은 엉망이다. 이제껏 마련한 패딩이 소용없어졌다고 해서 지난해 팔다 남은 유행 지난 반팔을 다시 꺼낼 수도 없는 일이다. 명민하던 사람조차 아둔해지는 순간이다.

천시와 지리는 인화로 모인다. 그렇다. 인화가 바로 하늘과 땅을 바꾸는 시대정신(Zeitgeist)이다. 시대와 맞추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둔해진다. 때를 알고, 자리를 보고, 사람을 살핀 뒤에 발을 뻗어야 지혜롭다. 이게 바로 성공적인 세일즈의 상식(常識)이 아닐까 한다.

이호영 현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연구원. 서강대 종교학과 학사·석사. 런던대학교(S.O.A.S.) 박사. 동양학 전공. 『공자의 축구 양주의 골프』『여자의 속사정, 남자의 겉치레』『스타워즈  파보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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