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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러슨 "북한과 2~3개 채널" 발언, 북핵 정국 전환점 오나

중앙일보

입력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만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EPA=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만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EPA=연합뉴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처음으로 북한과의 직접 대화 접촉을 시인했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달 30일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대화의지를) 살펴보고 있으니 계속 지켜봐달라"며 "우리는 (북한에) '대화를 하고 싶은가'라 묻는다. 북한과 두세 개 정보의 대화 채널을 열어두고 있다. '블랙아웃' 같은 암담한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그들(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 (중국 중재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화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가 북·미 간의 막후채널의 작동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북·미 간의 말 폭탄 수위가 높아지며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11월 3~14일 한·중·일 연쇄 방문을 앞두고 북핵 정국의 대전환 가능성을 보여준 상징적 발언으로 해석된다.
틸러슨 장관은 "전체적인 상황은 다소 과열돼 있다"며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멈추면 상황이 많이 진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과열'이 적용되는냐는 질문에는 "모든 이들이 사태 진정을 원한다고 생각한다"며 즉답을 피했다.
틸러슨의 이례적인 '북한 접촉' 발언은 크게 세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이날 발언이 시 주석과의 면담 직후 나왔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미국과 중국이 지나치게 높아진 한반도 긴장상황을 진정시킬 필요성에 합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유엔 대북제재안을 성실히 이행할테니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에 진지하게 임해달라"는 중국 측 요구와 "우리가 북한과 대화에 전향적으로 나서려 하니 중국은 (북한이 대화에 나서도록) 제재를 똑바로 이행해달라"는 미국 측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다. 또 평소에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틸러슨의 스타일 상 이날 강도 높은 발언의 배경에는 북핵 문제를 둘러싼 보다 구체적인 미·중 간 합의가 있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불과 하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중국을 찾은 것부터 그렇다. 틸러슨은 "중국이 뭔가 새로운 제안을 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답변을 피했다.
둘째는 오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일을 앞두고 도발을 자제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공개적으로 "태평양 상에서 역대급 수소탄 시험을 할 것"이란 발언까지 했다. 뉴욕타임스 (NYT)는 "미 국방부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시도 전 발사대 폭격이나 미사일 방어체계(MD)를 활용한 요격 등 공격적인 군사행동을 검토하는 와중에 틸러슨의 방중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만약 요격 등 미국의 대응이 실패로 끝날 경우 미국은 망신을 당하고 김정은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이런 상황을 우려한 틸러슨 장관이 선제적으로 '2~3개 채널'을 밝히며 북한에 유화적 메시지를 보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은 북한과의 '거래'는 중국을 통하지 않고 북한과 직접 할 것이란 의지를 내비쳤다는 점이다. 틸러슨은 이날 회견에서 "중국을 통해 대화하느냐"는 질문에 강하게 고개를 가로져으며 "자체적인 채널"이라 강조했다. NYT는 이날 "일련의 막후접촉을 통해 몇년 간 협상을 벌인 결과 핵 합의를 이끌어낸 오마바 행정부의 '이란 핵 협정'과 유사한 트럼프 행정부의 '자체 버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첫 징후"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북한의 도발이 강해지면서 대응 수위도 강경 일변도로 흐르고 있지만 후보 시절에는 "내가 당선되면 김정은과 햄버거를 먹으며 직접 협상할 것"이란 말을 하곤 했다.

"'대화를 하고 싶은가'라 묻고 있다"며 접촉 사실 최초로 공개 #긴박 사태 진정 필요성 중국와 공감한 듯, 북 미사일 요격도 부담 #다만 틸러슨 발언이 트럼프 생각과 일치하는지는 미지수란 지적도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30일 왕이 중국 외상과의 회담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30일 왕이 중국 외상과의 회담장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

하지만 틸러슨의 "'대화하고 싶은가'라 (북한에) 묻고 있다"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아직 북·미 간 접촉은 초보 단계에 불과해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었던 에반 메데이로스는 "중요한 건 대화의 유무가 아니라 미국이 다시 대화에 나설 수 있게 하는 '협상 전제조건'"이라며 "하지만 경제제재로 인한 대화 유도의 속도보다 북한의 핵·미사일 진행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대화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현재로선 북·미 간 접촉이 이뤄진다 해도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당장 틸러슨이 중국을 떠난 몇 시간 뒤 국무부의 헤더 노어트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북한 당국자들은 비핵화 대화에 관심이 있다거나 준비가 돼 있다는 어떠한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단기간에 대화가 진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장관이 대화채널을 시인하고 공개하자마자 대변인이 그 채널에서 아직 별 성과가 없다고 밝히는 촌극이 벌어진 것은 그만큼 트럼프 대통령의 '진의'가 틸러슨 발언에 실려 있다고 보기 힘든 대목이다.
또한 북한이 당 창건일이나 중국 공산당 대회(18일)을 전후해 또다시 미사일 도발에 나설 경우 대화론은 다시 수면 아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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