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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가족 상봉 장소는 정해 두셨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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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외교안보 선임기자

김수정 외교안보 선임기자

“내일 수소폭탄이 떨어지더라도 오늘 가을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이 스리스리 불면 행복한 사람, 그가 바로 남한 사람입니다.”

북핵 완성 한반도 위기론에 초연한 듯한 한국민 #안전벨트 매듯 유사시 대비해 놓고 할 일 하자

지난 3일 북한이 제6차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SNS에서 회자한 어떤 이의 트윗 글이다.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 폭발력의 10배가 넘는 수소폭탄을 북한이 산중에서 터뜨려 지축을 뒤흔들었는데도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웃픈’ 모습을 담았다.

북한은 가졌고 우리는 갖지 못한 절대무기 핵이 한반도의 안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닥쳤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에 이어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이동식 발사대에서 일본 홋카이도 머리 위로 날렸다. 방향만 틀면 괌 미군기지로 떨어졌을 거리였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안보 세상이 펼쳐졌는데, ‘놀랍도록 태연자약하다(surprisingly blase)’고 외신들이 표현할 정도로 한국은 차분하다. 서울 주재 한 외교관은 “2010년 국토(연평도)가 공격받는 상황에서도 평온해 신기했는데, 이번에도 놀랍다”고 했다.

왜일까. 몇 사람에게 물어봤다. “전쟁이면 어차피 전멸이니까, 차라리 잊고 산다” “무뎌졌다” “사는 게 팍팍해서 전쟁 신경 안 쓴다” “북한이 공격하진 않을 거다”. 저마다 다른 생각에도 가슴 한편의 불안감은 다들 있었다.

주변에는 나름의 대비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40대 부부는 2주 치 생수와 식량, 간이 화장실을 준비해뒀다고 한다. 아이들과 연락이 끊길 경우에 대비해 1차 상봉 장소를 서울 외곽의 외할머니댁, 2차 장소를 집(또는 집터)으로 정했다. 곧바로 만나지 못할 경우 매주, 헤어진 요일의 낮 12시에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까지 했다. 50대 독신 여성은 집을 계약하면서 전망 좋은 21층 대신 9층을 택했다. 계단으로 대피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30대 청년은 오토바이를 살 예정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되지만,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0%는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생화학무기를, 핵EMP탄(전자기파)을 쓰지 않길 바라지만 안 쓸 가능성이 0%는 아니다. 그동안 북한 도발로 숱한 청년들이 무고한 목숨을 잃었다. 종국에는 북·미가 대타협을 할 거라고는 하지만 핵을 결코 버리지 않을 북한에 대해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 북한의 궁극 목적은 미군 철수인데 막다른 대립이 어떤 위기로 비화할지 알 수가 없다.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핵국가 북한과 중국·러시아에 둘러싸인 한국에 어떤 위기가 닥쳐올지도 알 수 없다. 김정은에게 6·25전쟁은 할아버지 김일성이 못다 이룬 꿈이고, 미국은 ‘경제·외교적 대북 압박을 할 데까지 하고 안 되면 군사적 옵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기세다.

일본은 북한 미사일 발사 때 즉시경보시스템 ‘J 얼러트’를 가동해 주민 2500만 명에게 긴급 대비 지시를 하며 초 단위 대응에 나섰다. 헌법 개정을 위한 아베의 ‘오버액션’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괌 정부도 북한의 포위공격 위협 이후 2쪽짜리 비상 대피 메뉴얼을 주민에게 나눠줬다.

우리는 미사일이 날아오면 어디로 피해야 하나. 생화학무기가 터지면 지하로 대피하나, 고층으로 가야 하나. 차 속에선 어떻게 하나. 쓸데없이 공포감을 부추기자고 함이 아니다. 안보 현실을 직시하고, 만일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정부는 유사시 대비 시스템을 정비하고 국민에게 몇 쪽짜리 대응 안내문이라도 배포해야 한다.

일본에 헤이와보케(平和ぼけ)란 말이 있다. ‘평화 치매’란 뜻이다. 패전 이후 고도성장 속 평화에 익숙해져서 위기에 둔감해진 걸 경계하자는 말로, 일본 우파가 즐겨 쓴다. 최근 북한의 도발로 일본 내에선 이런 말이 쏙 들어갔다. 대신 “한국이 평화 치매에 빠졌다”고 수근거린다고 한다. 안보불감증은 우리 사회가 젖어 있는 안전불감증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안전벨트 매고 차를 타듯, 차분하게 대비는 해 두자. 추석 명절 가족이 모이면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 재회 장소라도 정해 놓자.

김수정 외교안보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