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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민주주의는 생활이다 - ① "짭스병 우리 대표님 좀 말려줘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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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생활입니다.

1960년 4월, 1980년 5월, 1987년 6월, 그리고 지난 겨울과 봄의 한국 역사는 ‘이것’으로 향하는 여정의 중요 변곡점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목표 지점에 거의 도달했다고 하고, 다른 이는 아직 멀었다고도 합니다. 현재형이면서 동시에 미래형인 ‘이것’은 바로 ‘민주주의(民主主義)’입니다.

2017년 오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투표로 권력을 결정하고, 그 권력이 위법하면 절차에 따라 끌어내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민주주의가 미완성 상태라는 얘기도 많습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임혁백 교수는 “민주주의의 완성은 절차적, 일상적 민주주의의 달성입니다.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행동 양식화해야 합니다”고 진단합니다.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은 지난 7월, 만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직 내에서 비민주적 관행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응답자 중 65.9%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불합리한 차별 등 비민주적인 관행을 목격한 경우가 있는지’에는 54.4%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 관행의 종류로는 ‘과도한 위계질서’(53.4%), ‘지나친 단체생활 강요’(36.2%), ‘학력ㆍ성별ㆍ연고에 의한 차별’(36.0%) 등을 꼽았고요.

조사 결과는 우리 사회의 ‘생활 민주주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중앙일보 취재진은 지난 두 달여 동안 다양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휴일까지 이어지는 상사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한 회사원 A씨, 늦은 시간까지 교수님 술시중을 든 대학원생 B씨…. 일상의 비민주성에 고통받는 이가 흔했습니다. 중앙일보는 창간기획 ‘민주주의는 생활이다’를 통해 담론 속에 파묻혔던, 소소한 일이라는 이유로 외면받기 일쑤였던 낡은 비민주적 관행을 하나씩 짚어갈 계획입니다.

생활 속 민주주의는 나, 그리고 나의 복수형인 우리가 사회의 진정한 주권자임을 삶에서 직접 확인해가는 과정으로, 민주주의의 궁극이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의 말입니다.



2017년 9월 xx일. 날씨: 하늘은 맑디맑은데 왜 내 눈엔 눈물이.

“내가 그냥 대표된 게 아니잖아요. 월급 주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시키는대로 하세요.” 오늘도 들었다. 그래, 20대 때부터 "대표님, 대표님" 소리 듣다 보니 세상 참 만만해 보이고, 모두가 발 아래로 보이겠지.

일러스트 = 심정보 디자이너

일러스트 = 심정보 디자이너

내가 남들이 다 가고 싶어가는 대기업에 다니다 2년 전 스타트업으로 이직하자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꼰대들 짜증나요. 나도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용기가 잘 안 나네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도 그랬다. 번듯한 회사에 들어갔지만 신나지 않았다. 윗사람들 옛날 무용담 듣는 회식, 받아 적기 바쁜 회의, 힘들었다. 최고위 임원이 방문하는 날에 50여 명이 도열해 일일이 악수하는 모습은 블랙코미디였다. ‘잘 나가는’ 선배들도 생존하려 애쓰는 생활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선배를 닮기 싫었다.

그래서 옮겼다. 스타트업(start-up)이 내뿜는 ‘아우라’에 혹해 적극적으로 구직했고, 강남의 한 회사에 입사했다. 처음엔 신세계였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 성과와 직결된다'는 자부심에 야근을 자청했다. 열정페이 아니냐고? 내가 주도한다는 성취감으로 보상은 충분했다. 하지만, 딱 1년 정도였다.

지난해 9월 회사 워크숍을 기획했다. 직원들 의견을 모아 회사 근처 레지던스 호텔에서 와인을 마시는 행사를 준비했다. ”별론데요. 그냥 제가 정할게요.“ 대표는 한 칼에 잘랐다. 결국 우리는 경기도 청평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밤을 보냈다.

사실 그즈음부터 ‘이게 아닌데’하는 경우가 늘었다. 창업자는 프레젠테이션에만 능했다. 말은 청산유수지만 지시는 애매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이노베이션, 크리에이티브, 엣지가 중요한 거 모르세요?"

모든 스타트업이 이렇지 않다는 것 안다. 하지만 이 업계에 ‘잡스병’이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회사가 희귀종은 아닌 모양이다. 짭스병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상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어설프게 모방하는 대표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물론, 잡스와 같은 천재성은 찾기 어렵다. “내가 다 알아. 나만 따르면 돼”식의 리더십이 곳곳에 묻어난다. 식사 메뉴 정할 때는 대기업 부장 뺨친다. 5일 연속으로 평양냉면만 먹어본 적도 있다.

이런 리더십이 업무와 연계되면 문제가 커진다. '코딩'을 모르면서 개발자에게 간섭하고, 인사와 마케팅에까지 '깨알' 지시를 한다. 스타트업에선 수평적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한 번은 출근하자마자 대표가 나를 부르더니 “요즘 회사에 불만이 많다면서요”라고 했다. 며칠 전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다 농담삼아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집은 언제 사지” 했던 게 대표의 귀에 들어간 거였다. 회사는 대표의 최측근, 측근, 추종자로 서열화돼 있다.

채용 시스템도 엉망이다. '대표 맘대로'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개 스타트업은 친구ㆍ선후배 등 주변 인맥과 함께 시작한다. 기업 규모가 커지면 시스템에 따라야 하는데 여전히 알음알음 채워간다. 또 서울대면 서울대, 카이스트면 카이스트. 대표의 출신 학교 후배들만 뽑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번은 대표에게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 학교 애들이 똑똑한 건 이미 검증된 거잖아요.”

2003년부터 10곳의 스타트업을 거친 선배의 경험도 비슷하다. 그는 나름 중견이지만 여전히 대표로부터 “너 이 업계에 다시는 발 못붙이게 할 거야”라는 농담을 듣는다고 한다. 앞에선 웃어넘기지만, 울컥할 때가 많단다. 실제로 대표는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업계는 좁다.

단점을 써대긴 했지만, 스타트업이 마냥 나쁘다는 건 아니다. 특유의 매력은 분명히 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 열정적으로 신사업을 개척하는 곳도 많을 거다. 2011년 6만5000개였던 신설 스타트업이 지난해 9만6000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스타트업 '붐'이라 할 만한데, 거기엔 이유가 있을 거다.

어찌됐든 나는 자율과 창의라는 멋진 세계를 꿈꾸며 택한 이 곳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를 오늘도 고민한다.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가 지난 6월 스타트업 근무 경험자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775명이 그만뒀다고 한다. 평균 근속연수는 21개월로 대기업(10.4년)과 비교도 안된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이 글은 스타트업계에서 14년간 근무한 송모(38)씨, 4년간 대기업에 다니다 2014년 스타트업으로 이직한 김모(32)씨의 이야기를 일기 형태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홍상지·김준영·하준호 기자 hongsam@joongang.co.kr

[400자 상담소] 스타트업, 조직원과 함께 성장하라

임정욱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임정욱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

 “스타트업은 대개 창업자 중심으로 발전합니다. 소수 정예인 초기 스타트업은 창업자 위주의 ‘독재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니 사내 정치도 있습니다. 스타트업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기술로 기존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초기 기업입니다. 대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구성원이 이해할 만한 기준을 토대로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창업자 혼자 스타가 되려하면 안됩니다. 경험과 지식을 쌓아가며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스톡옵션 등으로 금전적 과실을 나눈다면 금상첨화일 겁니다. 좋은 스타트업에서 일한 사람들은 ‘대기업에 있을 때보다 몇 배 더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민주주의의 원칙과 덕목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좋은 스타트업이라는 얘기입니다.”
-임정욱 스타트업 얼라이언스(스타트업 지원 민관협력네트워크)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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