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8일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 소치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한 바퀴를 남겼을 때였다. 갑자기 마지막 코너에서 긴 다리가 성큼성큼 얼음을 지치고 툭 튀어나왔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0·한체대)였다. 키 1m74㎝인 심석희는 긴 다리를 이용해 반바퀴를 남기고 1위로 달리던 중국의 리지안러우를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 추월했다. 심석희의 막판 스퍼트가 없었다면 한국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부터 심석희는 '롱다리 신(新)인류'로 불렸다. 역대 한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은 키가 크지 않았다. 쇼트트랙은 짧은 원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체형이 큰 것보다는 작은 게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여자 쇼트트랙 전설로 불리는 전이경은 1m63㎝고, 진선유는 1m64㎝다. 이들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순발력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반면 심석희는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이 솟아 있을 정도로 크다. 그래서 긴 다리를 이용해 코너에서 아웃코스로 추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인코스가 아닌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이 떨어진 마지막 바퀴에서 아웃코스 추월은 남자 선수들도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 대범한 기술이다.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 3관왕에 올랐던 진선유 단국대 코치는 "여자 선수들은 바깥쪽 추월이 힘들다. 보통 상대가 틈을 보일 때 센스있게 안쪽을 추월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보통 키가 크면 힘도 셀 거라 생각하지만, 심석희는 타고난 힘이 센 편은 아니다. 키가 크지만 날씬한 '모델같은 체형'이기 때문이다. 소치 대회 때는 키 1m74㎝에 몸무게는 57㎏ 정도였다. 체질량지수가 저체중과 정상의 경계을 넘나들었다. 키는 크지만 다소 마른 몸매로 인해 경기복 허리 부분이 항상 헐렁했다. 그는 18일 서울 태릉선수촌 빙상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경기복이 몸에 착 달라붙어야 경기할 때 편하다. 그런데 나는 키가 커서 제일 큰 사이즈를 입는 대신 허리가 커서 항상 수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 여자 500m 결승에서 심석희가 중국 판커신의 '나쁜 손'에 석연찮게 실격 판정을 받았을 때, 순간적인 파워가 떨어졌다. 당시 판커신은 마지막 코너에서 왼팔을 쭉 뻗어 심석희의 오른다리를 붙잡았다. 명백한 실격 사유였다. 이 과정에서 심석희는 무리하게 인코스를 파고들었다는 이유로 판커신과 함께 실격됐다. 이로 인해 판커신과 심석희는 메달을 따지 못했고, 판커신의 팀 동료인 장이제(중국)가 금메달을 가져갔다. 당시 심석희는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자책하며 "평창올림픽까지 순간적인 파워를 끌어올려 경합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르겠다"고 했다.
키 1m74cm 롱다리, 아웃코스 추월 장점 #마른 몸이 약점, 근육 키워 체중 3kg 늘려 #순간 파워 장착하고 업그레이드 된 레이스
그래서 심석희는 올 여름 내내 웨이트 트레이닝에 집중했다. 그리고 지방은 쏙 빼고 근육량을 늘려 소치 대회 때보다 몸무게를 3㎏ 증가시켜 60㎏가까이 만들었다. 심석희는 "비시즌동안 파워 늘리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최대한 근육량을 늘렸다. 평소보다 근력운동을 많이 해서 한 번에 힘을 모아 쓸 수 있게 보완했다"고 말했다. 스스로에게 잘 맞는 최적의 근력을 장착한 심석희는 평창올림픽까지 더는 체중을 늘리지 않고 유지하기로 했다.
근력을 키워 순간 폭발력을 업그레이드 시킨 심석희가 500m에서도 선전할 수 있을까. 단거리는 짧은 순간 폭발적인 힘을 내야하기 때문에 근육이 발달한 선수가 유리하다. 그동안 심석희는 순간 파워가 떨어지고 지구력이 좋아 1000m·1500m에서 활약했다. 심석희는 "아무래도 주종목은 1000m와 1500m지만 500m도 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준비하겠다"고 했다. 심석희는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2017~18시즌 쇼트트랙 1차 월드컵에 출전한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