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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하면 공무원 보직 이동···계란 파동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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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정부 효율성 높이려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 A 사무관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박사다. 국내 최고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이명박 정부 당시 박사 특채로 공무원이 됐다. 정부가 공무원의 전문성을 보강하기 위해 만든 ‘정규직 공무원 경력 채용’ 과정에 합격한 것이다. 첫 2년간은 본인의 전공과 그리 멀지 않은 분야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시작하면서 부처가 쪼개지고 합쳐지는 과정에서 A 사무관의 전공은 실종됐다. 그는 이후로 최근까지 4년여간 자신의 전공과 전혀 무관한 전문 분야에서 ‘전문직위 전문관’으로 근무하면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나마도 조만간 이 분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인사 발령이 날 예정이어서 4년간 새로 쌓은 전문성은 또다시 말짱 도루묵이 될 판이다. A 사무관은 그래도 자신의 부서장에 비하면 ‘양반’이다. 서기관급이 맡아온 이 부서의 장은 지난 3년간 4명이나 바뀌었다. A 사무관이 ‘알 만하면 떠나는’ 경우라면 A 사무관의 부서장은 ‘알기도 전에 떠나는’ 셈이다.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 제안 #한국 정부 효율성 7년 새 6계단 하락 #직급별 순환으로 업무 경직된 탓 #총리 산하 고위직 조정실장 두고 #정책·전문가로 관료 나눠서 관리 #‘Y자형 경력발전제도’ 도입도 추천

대전의 한 정부 출연 연구소 관계자는 “전임 국·과장 때 시작한 국가 연구개발(R&D) 프로젝트가 국·과장이 바뀌면서 판단이 달라지고 이 때문에 예산이 줄어들거나 연구 방향이 바뀌는 바람에 추진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며 “연간 20조원에 달하는 국가 R&D의 성과가 제대로 나오려면 과학기술 정책의 일관성과 관료의 전문성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공직사회의 순환 보직 관행과 전문성 부족은 해묵은 숙제다. 국가 R&D의 비효율성뿐 아니라 최근 발생한 살충제 계란 파동, 2014년 세월호 참사의 원인 등도 공무원의 경직성과 비전문성에 기인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같은 평가는 지표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국은 지난 5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17 국제경쟁력 평가’ 중 정부 효율성 부문에서 평가 대상 63개국 중 28위를 기록했다. 더 심각한 것은 지난 7년 사이 순위가 여섯 계단이나 떨어져 한국 정부의 효율성에 대한 평가가 해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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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4차 산업혁명 분과(분과장 김태유 서울대 교수) 위원들은 이 같은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고 공직의 인사 개혁이 곧 국가 개조라는 데 입을 모았다. 구체적 실행 방법으로는 공무원이 특정 부처에 소속돼 보직을 순환하는 제도를 버리고, 부처 간 벽을 넘어 유사·관련 직무들 사이에서 승진과 전보가 이뤄지는 ‘직무군(群) 제도’를 도입하자고 입을 모았다.

『정부의 유전자를 변화시켜라』(2009)의 저자이기도 한 김태유 교수는 “모방경제 시대에 가장 유능한 관료는 담당 업무에 대한 전문성보다 선진국 사례를 빨리 모방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였다”며 “지난 세기 한강의 기적을 성공시킨 엘리트들이 이런 제너럴리스트 관료들”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제 한국을 비롯한 세계는 단순 모방이 가능했던 초기 산업사회에서 벗어나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지식기반사회로 이행하고 있다”며 “관료사회도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한 시대가 왔다”고 설명했다.

4차 산업혁명 분과는 현재의 한국 정부 조직이 급변하는 환경에 신속히 조정되기 어렵고, 일사불란함과 효율성을 찾기 어려운 경직적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봤다. 그 주된 원인은 정부 조직 운영 경직성의 근간인 직급별 TO(정원)제의 경직성 때문이라는 게 위원들의 판단이다. 이 경직적인 직급별 TO제로 인해 공직사회의 관행적 문제인 순환 보직이 파생됐다. 예를 들면 실·국의 주무과장 자리에 승진을 앞둔 부이사관이 1년 남짓 머물다가 고위 공무원으로 승진해 떠나가면 차 순위 과장이 그 주무과장 자리로 이동하는 식이다. 그리고 차 순위 과장의 자리는 차차 순위 과장이 채우게 된다. 이렇게 연쇄적인 부처 전체의 인사 발령이 관료의 전문성과 업무의 연속성을 방해하고 있다.

분과위는 공직 인사 개혁을 위해 크게 네 가지 정책 제언을 했다. 첫째, 기존의 공직 분류 체계를 개편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공직 분류 체계는 직군·직위·직렬 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분류는 직무조사와 분석·평가를 거쳐 도입된 게 아니라 단순히 공직을 분류하고 구분하기 위한 도구들이라고 봤다. 이 때문에 일반직 공무원이 너무 많고 공무원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능이 부족하며 시대 변화에 뒤떨어진다.

분과위는 대안으로 고급 공무원의 직무군·직무열 제도를 도입하자고 제언했다. 현재는 고급 공무원이 한 부처에 들어가면 그 부처 내에서만 근무하게 된다. 예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정년까지 승진 과정 속에서 해당 부처 보직들을 순환한다. 직무군·직무열 제도란 승진과 전보를 부처 간 벽을 넘어 범(凡)부처적으로 하지만 맡은 직무는 크게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산업 IT직무군이 있다면 그 공무원은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유사 직무를 넘나드는 형태다.

둘째, ‘Y자형 경력발전제도’를 통한 정책 관료와 전문 관료제 도입이다. 사무관이 중견 간부로 특정 부처에 배치되면 몇 개의 직무군 보직을 경험하며 경력을 쌓는다. 그러다 10년쯤 지나서 교육 훈련을 받고 전문 관료가 되면, 예컨대 산업 IT직무군 안에서도 기계소재·정보통신 직무열 등 한 개의 직무열 내 보직에서만 근무하게 된다. 만약 정책 관료가 되기를 희망하면 직무군 내에서 여러 직무열을 넘나들며 범부처적으로 승진과 전보를 할 수 있다. 직무군 안에서 전문성을 가지면서도 넓은 정책적 시야도 가지게 되는 장점이 있다.

셋째, 부처를 초월해 직무군별로 고위 관료에 대한 인사심사권과 정책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고위급 조정실장 제도 도입이다. 대통령 비서실이나 국무총리실 산하에 조정실장들을 둬서 이들이 범부처적으로 직무군에 대한 정책 조정이나 인사 심사를 하게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산업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간 문제가 생길 때 해당 직무군 조정실장이 이를 조정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김택동 강원대 교수는 “조정실장제가 도입되면 전 정부를 대상으로 전문성에 따라 공무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같은 직무군·직무열에 따른 전문적 교육훈련 제도가 확충돼야 한다는 게 분과위원들의 의견이다.

민경찬 국무총리실 인사혁신추진위원장은 “그간 공무원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계약직 개방형 공무원제와 정규직 경력 채용, 전문직위 전문관제 등이 도입됐지만 정착에 한계가 많았다”며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직무군·직무열제의 도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권예솔 인턴기자 joon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