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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적폐 청산'은 법률가의 용어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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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정보원 퇴직자 모임인 양지회 전·현직 간부들의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법원과 검찰이 정면충돌했다. 검찰은 법원의 영장 기각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서울중앙지검은 8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법원 결정을 존중하고 감내해 왔으나 최근 일련의 구속영장 기각은 이전 영장전담 판사들의 판단 기준과 차이가 많은 것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2월 말 새 영장전담 판사들이 배치된 이후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 등 국정 농단사건 핵심 인물들의 영장이 거의 예외 없이 기각돼 왔다는 주장이다. 공판에 출석한 특별검사를 수십 명의 경찰이 경호 중인데도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한 피의자에 대한 영장은 물론 통신영장·계좌영장까지 기각해 공범 추적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불만도 쏟아냈다.

법원은 즉각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공보관실은 이날 “영장전담 법관이 바뀌어 구속영장 결과가 달라졌다는 발언은 심히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범죄 혐의는 소명되나 수사 진행 경과 등에 비춰 도주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이런 식으로 영장이 기각되면 국정 농단, 적폐 청산 등과 관련된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검찰의 사명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적폐 청산을 위해서라면 관련 피의자의 영장이 발부돼야 마땅하다는 얘기인가. 형사소송법에 정한 불구속수사의 원칙과 도주·증거인멸 우려라는 구속 기준은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결정하면 될 일이다. 거기에 보수·진보나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적폐 청산이 정치인의 구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법을 적용해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법률가의 용어는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