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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ICT 회사에 재벌 규제 잣대 … “검증 받는 것은 타당” 의견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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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출자총액제한제도·상호출자금지 등 오늘날 대기업을 규제하는 제도(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는 1987년 4월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면서 처음 도입됐다. 재벌 기업 총수와 그 일가 친척들이 계열사를 통제하고 시장을 독과점하는 문제를 국가가 규제, 방지하기 위해서다.

대기업 규제 제도 1987년 첫 도입 #IT 특성상 일감 몰아주기 힘들지만 #네이버 개인·친족 기업 드러나 #기업인 책임 강화할 제도 보완 필요

네이버·넥슨 등이 새로 이름을 올린 공시대상기업집단도 대기업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지정 기준을 자산총액 5조원에서 10조원으로 올리면서 새로 도입된 제도다. 이번에 동일인(총수)으로 지정된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앞으로 본인과 친인척이 거래할 경우 공시해야 하고, 이를 어길시 처벌을 받게 된다. 이번 공정위 발표로 이 창업자 본인과 친족이 관련된 3개 회사가 발견돼 이들 회사에 대한 조사도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공정위가 이 창업자를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한 근거는 ▶이 창업자가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지분(4.31%) 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창업자가 대주주 중 유일하게 경영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네이버는 이 창업자를 ‘설립자’(파운더)로 공시하고 네이버 내에서 그에 대한 설립자로서 입지와 인식도 분명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네이버는 ▶이 창업자 총수라기엔 턱없이 적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친인척의 지분이나 순환출자가 없고 ▶전문경영인과 이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경영 체계를 확립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지난 3월 이사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 창업자의 공식 직함은 GIO(Global Investment Officer)로, 글로벌 시장 개척과 투자 관련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네이버 이사회는 변대규 의장이, 국내 경영 전반은 한성숙 대표가 맡고 이 창업자는 전면에서 완전 물러나 있다고 네이버는 주장한다.

네이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일부러 의장직을 내려두고, 대표 직함도 맡지 않은 것인데 총수 지정 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네이버 경영을 맡아야 한다면 그야말로 촌극”이라고 비판했다. 네이버는 자사가 KT나 포스코처럼 ‘총수 없는 대기업’의 경우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30년 전 재벌 기업들의 족벌, 세습 경영을 규제하기 위해서 만든 대기업집단 제도를 네이버나 넥슨 같은 정보통신 업체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를 다시 짚어보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병태 KAIST(경영대) 교수는 “외국에서는 존재하지도 ‘총수’라는 개념을 도입해 총수와 이들 일가의 전횡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최경진 가천대(법학과) 교수는 “자산 규모가 커졌으니 재벌 기업과 같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지적은 어불성설”이라며 “네이버가 커지면서 이용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과 네이버를 재벌 기업으로 규정하고 규제해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라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과거 제조업을 중심으로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하던 재벌 기업들의 성장 방식과 최근 서비스·IT 업종은 성장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중견 IT 기업 관계자는 “IT 업종의 경우 원청과 하청의 개념이 없고, 일감 몰아주기 같은 것은 시도하기가 어려운 사업 구조가 많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검색 서비스와 쇼핑 서비스를 총수 일가 친척들이 나눠서 경영한다고 해도 서로에게 일감 몰아주기를 해주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제조, 물류, 판매 회사를 별로도 세워 서로 일감을 몰아주는 전통적인 제조업과 IT 기업을 동일 선상에 놓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정위의 애매모호한 동일인 지정 기준도 문제다. 네이버는 법에 명시된 동일인의 ‘사실상 지배’ 여부를 지분율과 경영 활동 영향력 등을 고려해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공정위는 5월 롯데그룹 총수를 신격호 총괄 회장으로 지정하며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유 지배구조”라고 설명했다. 네이버측은 "신 회장을 총수로 지정한 논리대로라면 네이버는 법인 자체가 총수가 돼야한다”고 반박한다.

김상조 공정위 위원장은 취임하면서 "시대착오적 규제 개혁할 것”이라고 했지만 새로 성장하는 IT, 벤처기업들이 앞으로 이같은 대기업집단 규제를 받는 것은 또 다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할 수도 있다.

외신들도 재벌(chaebol)이라는 고유 단어로 쓸만큼 부정적인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5월 한국의 재벌 기업 구조를 지적하며 "가족간 유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운영하며 이 연대구조는 잘라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규제의 본질은 어떻든 간에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해외에서 ‘재벌 총수가 경영하는 투명하지 못한 회사’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다는 게 업계의 항변이다.

이병태 교수는 "소수 지분으로 회사를 장악해 왔던 게 그간 국내 기업의 현실”이라며 "네이버가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규제 당국이 끝끝내 믿어주지 않는 것도 한국 경제계의 불행”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정위의 이번 발표로 이 창업자의 개인 소유 기업과 친족 기업이 드러난만큼 규제 당국의 검증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까지는 이들 기업 3곳이 네이버와 내부 거래를 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남동일 공정위 기업집단과장은 "네이버와 직접적인 거래 가능성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지만 추후 내부거래현황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최경진 교수는 "수십년 전의 재벌 기업을 규제하는 제도 대신 ICT 기업들이 창업자의 책임성을 강화할 수 있게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며 "이번 네이버 논란을 계기로 글로벌 대기업들을 키우기 위한 새로운 규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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