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혁명은 양복을, 도자기는 제국주의를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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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소비의 역사
설혜심 지음, 휴머니스트

혁명의 평등주의 열기로 양복 유행 #도자기, 식민지 개척 욕망에 기름 #세상의 변혁에 영향 주고 받는 소비 #주변에 흔한 일상용품들 뿌리 밝혀

『소비의 역사』의 부제는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다. 과장법이 사용됐다. ‘소비의 역사’는 1980년대 이후 역사학에서 뜨거운 연구분야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껏’ 앞에 ‘국내에서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게 더 정확하다.

많은 학자들이 일찍이 소비에 주목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는 소비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경제학자 장바티스트 세(1767~1832)는 1803년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비가 역사학의 주요 분과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다. 소비사(消費史, history of consumption)는 신생 학문이다.

저자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는 전작 『그랜드 투어』 『서양의 관상학, 그 긴 그림자』 『온천의 문화사』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전혀 사소하지 않은 역사의 주춧돌을 방대한 자료 섭렵으로 조명한다. 소비는 근현대를 만든 중요한 종속·독립 변수다. 소비는 세상의 나머지와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영국 명예혁명(1688)과 프랑스 혁명(1789)은 소비에 거대한 영향을 줬다. 예컨대 혁명의 평등주의 열기는 우리가 입고 있는 양복을 낳았다.

인과(因果)의 화살표는 거꾸로 흐르기도 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 소비, 소비가 대변혁을 이끌었다. 중국산 도자기는 ‘미지의 세계를 소유하려는 유럽의 욕망’에 기름을 부었다. 도자기라는 소비품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거대한 국제정치적 변화에 한몫한 것이다. 『소비의 역사』에는 그런 사례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제작한 중국풍 도자기 신발. [사진 휴머니스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제작한 중국풍 도자기 신발. [사진 휴머니스트]

이 책은 우리 주변 주변의 어딘가에 놓인 온갖 긴요한 것들의 뿌리를 밝혀준다. 예컨대 기성복은 1824년 포목상인 피에르 파리소가 상점을 열고 처음 팔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은 골동품이 됐지만, 한때 필수 혼수품이었던 가정용 재봉틀(‘미싱’)의 아이디어가 처음 나온 것은 1865년이다. 마음을 쓰리게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19세기 말부터 남부 아프리카에 비누가 침투했다. 한 흑인 학생이 백인이 되려고 열심히 세수했다. 얼굴이 하얗게 되지 않자 그 학생은 선교사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백인이고 우리는 아직도 흑인이잖아요.”

‘소비의 역사’는 서구화·세계화의 역사다. ‘유럽의 팽창(the expansion of Europe)’을 동반한 서구화, 유럽의 바통을 이어받은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파악하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앞으로 도래할 세계화 2.0, 세계화 3.0 시대에서도 그 중핵이나 아주 중요한 귀퉁이는 소비다.

소비가 악덕이라는 오명을 벗은 것은 ‘최근’이다. 1961년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경제백서』의 부제는 ‘소비는 미덕이다’였다. 당시만 해도 갸우뚱하게 만드는 표현이었다. 유럽도 아시아도 애초에는 소비에 부정적이었다. 조선 국왕 정조는 1788년 왕명으로 가체(加髢)를 금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원은 1512년 포크·나이프를 결혼 축하 선물로 줄 경우 6쌍으로 제한했다.

석기시대부터 인간이 가장 즐겨 소비한 게 있다면 그것은 즐거운 스토리가 아닐까. 저자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소비의 역사』에는 “역사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단초”가 가득 담겼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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