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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닮은 특이외모에도 놓친 강도살인범…15년만에 잡은 결정적 단서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만5000건의 통화내용 가운데 살인범의 휴대번호를 찾아라.’

1만5000건의 통화내용 뒤져 살해범 휴대전화 번호 특정 #가입자 정보 찾기 위해 1년간 금융거래, 인터넷 홈페이지 뒤져 #15년만에 잡힌 살인범 각종 증거자료에도 범행 일체 부인

2015년 9월 ‘부산 사상구 괘법동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 재수사에 나선 부산경찰청 형사과 장기미제수사팀에 주어진 미션이다. 부산경찰청은 2년간 끈질긴 수사를 벌여 사건 발생 15년 만인 지난 8월 21일 피의자 양모(46, 범행당시 31)씨를 자택 앞에서 검거했다. 공범 오모(38·여, 범행당시 23)씨, 이모(41·여, 범행당시 26)씨도 붙잡았다.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은 종업원 양모(당시 22)씨가 2002년 5월 21일 오후 10시쯤 다방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길에 납치됐다가  열흘 뒤 부산 앞바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양씨가 실종된 다음 날인 2002년 5월 22일과 보름 뒤인 6월 12일 양씨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용의자들의 얼굴이 폐쇄회로(CC)TV에 찍혔다.

용의자 양씨는 턱이 길고 입이 툭 튀어나와 모자를 쓰고 있어도 지인이라면 단번에 알아차릴 만큼 독특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경찰은 피해자 주변인 탐문을 벌였지만, 양씨를 안다는 사람은 없었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경찰은 사회적 뭇매를 맞아야 했다.

괘법동 살인사건

괘법동 살인사건

2002년 부산 괘법동 태양다방 종업원을 살해한 피의자 양모씨를 도와 종업원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공범 2명의 모습이 CCTV 화면에 찍혔다. [사진 부산경찰청]

2002년 부산 괘법동 태양다방 종업원을 살해한 피의자 양모씨를 도와 종업원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하는 공범 2명의 모습이 CCTV 화면에 찍혔다. [사진 부산경찰청]

그로부터 13년 뒤인 2015년 9월 부산경찰청은 장기미제수사팀을 꾸리자마자 이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형사 경력 27년인 김중갑 형사는 피해자의 돈이 인출된 은행 주변에서 불특정 다수인이 통화한 통화내역 1만5000건을 확보했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살인범의 휴대전화 번호를 특정하지 못해 이름 등 가입자 정보를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사에 진척이 없자 시민 제보에 기대를 걸었다. 2016년 2월 부산경찰청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피의자 양씨와 공범 2명의 얼굴을 공개했다. 두 달 뒤인 2016년 4월, 공범인 이씨를 안다는 결정적 제보가 들어왔다. 공범 2명의 신원을 확보한 김 형사는 1만5000개의 통화내역에서 공범인 오씨의 휴대번호로 걸린 1건의 통화내용을 확보했다. 살인범이 특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살인범의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했지만 가입자 정보를 알 수는 없었다. 이동통신사가 계약해지 5년이 지나면 가입자 정보를 폐기해서다. 김 형사는 영장을 발부받아 금융기관과 각종 인터넷 홈페이지에 해당 번호가 기재된 개인정보를 일일이 뒤지기 시작했다. 지루한 작업의 연속이었다. 1년 넘게 수사를 벌인 뒤에야 휴대전화기 가입자의 주민등록번호를 가까스로 알아냈다.

그제서야 수사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김 형사는 양씨 집 앞에서 잠복했고, 결국 지난 8월 21일 공장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양씨를 붙잡았다. 수천 번도 더 봐왔던 CCTV 화면 속 얼굴 그대로여서 양씨를 단번에 알아봤다. ‘오리’라는 별명처럼 입은 툭 튀어나왔고, 귀는 당나귀처럼 봉긋 솟아있었다.

부산경찰청 박준경 강력계장이 31일 부산 괘법동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검거한 사실을 브리핑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부산경찰청 박준경 강력계장이 31일 부산 괘법동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검거한 사실을 브리핑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하지만 양씨는 범행 일체를 부인하고 있다. 김 형사가 50여명의 참고인 증언을 들이댔지만 양씨는 범행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양씨와의 관계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김 형사는 “피해자 유족들이 양씨를 전혀 모른다고 하는 점 등으로 미뤄 양씨가 우연히 찾은 다방에서 피해자를 지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양씨를 도운 공범 2명 역시 인근 술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로 사건 발생 이후 돈 인출을 의뢰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범행 뒤 양씨가 피해자 양씨와 비슷하게 생긴 공범인 종업원에게 “수고비를 줄테니 통장을 해약하고 인출하라”며 양씨의 통장에서 500만원을 인출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양씨는 현금인출기에서 피해자의 돈 290만원 뽑아썼다.

부산경찰청은 CCTV 화면 속 얼굴과 양씨의 현재 모습이 일치한다는 감정 결과와 현금 인출 당시 양씨의 필적 등을 증거로 확보하고 살인 혐의로 지난 8월 25일 부산검찰청에 송치했다. 양씨의 공범인 오씨와 이씨는 처벌 가능한 공소시효 기간이 지나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 사건을 지휘한 부산경찰청 박준경 강력계장은 “늦게마나 억울하게 사망한 피해자의 영혼과 유족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게 돼 다행이다”며 “죄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죄 값을 치르게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미제사건도 수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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