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아이로 양육수당 챙긴 승무원 사건, 출생 신고 제도에 구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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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관이 발행하는 출생 증명서 양식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류모(41)씨는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 인터넷에서 찾은 양식으로 가짜 출생 증명서를 만들었다.

의료기관이 발행하는 출생 증명서 양식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류모(41)씨는 2010년과 2012년 두 차례 인터넷에서 찾은 양식으로 가짜 출생 증명서를 만들었다.

지난 28일 오전 인천 청라국제도시의 한 아파트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아이 두 명을 낳았다고 허위 신고하고 정부와 회사에서 지원금 4840만원을 챙긴 혐의로 항공사 승무원 류모(41·여)씨를 6개월 동안 추적한 끝에 이날 체포했다. 류씨는 2010년 3월과 2012년 9월 두 차례 강남구청에 허위 출생신고를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출생 증명서 양식에 2007년 사망한 강남의 한 산부인과 의사 이름을 적어 가짜 출생 증명서를 만들어 냈다. 허위 출생신고는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2월 서류상의 류씨 첫째 아이가 신입생 예비소집에 나타나지 않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7년 만에 밝혀졌다.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굉장히 드문 사례지만 출생신고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모방범죄를 막기 위해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출생신고 책임은 부모에게만…구청에서는 사실여부 확인 못해 

현행법상 의료기관은 출생신고에 개입하지 않는다. 거짓 출생 증명서를 내도 담당 공무원들에게는 확인할 권한이 없다. [중앙포토]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현행법상 의료기관은 출생신고에 개입하지 않는다. 거짓 출생 증명서를 내도 담당 공무원들에게는 확인할 권한이 없다. [중앙포토]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류씨가 허위 출생신고를 했던 강남구청에는 하루 30~40건의 출생 신고가 접수된다. 직원 두 명이 접수를 받고 네 명이 서류 심사와 주민등록부를 작성한 뒤 두 명이 서류를 재검토한다. 출생신고뿐 아니라 사망·혼인·이혼 신고 등 가족관계등록 전반의 민원을 처리하기 때문에 빠듯한 인력이다. 구청 관계자는 "형식적 심사만 진행할 뿐, 병원에 출생 사실을 확인하는 연락을 취하지는 않는다"며 "출생 사실까지 확인해야 한다면 다른 민원을 처리할 수가 없을 뿐더러, 사실 확인을 어느 수준까지 어떻게 할지도 모호하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출생신고의 책임은 출생신고의무자인 부모에게만 있다. 병원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의료기관은 출생 증명서를 발급해줄 뿐 출생 등록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아이 부모가 출생 신고서와 의료기관의 출생 증명서를 제출하면 된다. 류씨처럼 위조한 출생 증명서를 들고 가도 담당 공무원이 출생신고 기재사항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의무도 권한도 없다. 구청에서는 서류에 의사 서명이 있는지, 병원 대표 직인이 찍혀있는지만 확인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의료기관이 출생신고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중국·일본 뿐이다. 반면 호주, 뉴질랜드, 영국, 캐나다 등은 의료기관에서 정부에 출생 사실을 통보한다. 독일은 부모와 의료기관 모두에게 출생신고 의무가 있다. 프랑스와 싱가포르는 법률에는 부모가 출생신고 하도록 돼있지만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에 출생신고가 가능하도록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2013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 가족관계등록 담당 공무원의 77.9%, 법률전문가 82.4%가 의료기관이 출생 통보하는 제도 도입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의료기관이 출생신고 하는 법안 발의…의료단체는 반발 

허위 신고로 보조금을 부당 수령하는 사례도 문제지만, 허술한 출생신고 제도 때문에 신고에 누락된 아동이 범죄의 사각지대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함진규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달 의료기관이 아이의 출생 증명서를 관할 자치단체장에게 보내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행정 편의주의라며 반발하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달에 "의료기관은 행정기관이 아니다. 아무런 비용 경비의 보전도 없이 행정기관의 업무를 위탁 강제화하는 행위로 입법 만능주의 탁상 행정이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이달 초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의료기관의 행정부담을 고려해 의료기관이 출생기록을 지방자치단체장이 아니라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에 보내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심평원은 의료기관이 진료비 청구하기 위해 관련 자료는 보내는 기관이라 의료기관의 행정업무 부담을 덜 수 있다.

이현 기자 lee.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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