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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 시대의 부활을 꿈꾸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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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29면

TV 채널을 돌리다 낯선 남자들의 노래에 마음을 뺏겼다. 이웃집 총각처럼 수수해 보이는 청년들이지만, 오랜 단련으로 조각된 아름다운 발성이 터질 때마다 귓전이 녹아내린다. JTBC의 남성 4중창 크로스오버 그룹 결성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 얘기다. 이 ‘남성 보컬의 재발견 프로젝트’는 지난해 말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며 무명 음악인들을 스타로 만들었다. 1월 막을 내린 시즌1의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는 데뷔 음반이 1만 5000장 이상 판매되고 전국 14개 도시 투어콘서트 유료 판매율이 98%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 중이다.

‘팬텀싱어’들이 열어갈 틈새시장

그리고 지난 11일 시즌2가 시작됐다. 아직 초반이긴 하지만 시즌1보다 출연자 수준이 확 업그레이드됐다. 뮤지컬계에서도 신인 배우 중심이었던 시즌1에 비해 주연급 배우들이 여럿 나왔다. 더 놀라운 건 성악 전공자들의 진격이다.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바리톤 김주택을 비롯해 독일에서 대학원 휴학까지 하고 참가한 베이스바리톤 김동현 등 이미 검증이 끝난 쟁쟁한 실력자들이 귀호강을 제대로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클래식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시즌1의 신드롬 취재 당시 한 평론가는 “안 그래도 크로스오버에 기웃거리는 성악가들이 많다”고 폄훼하며 “대중매체에 오르내리면서 괜히 몸값만 높아지고, 어차피 클래식 무대에 돌아오지도 않으니 성악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팬텀싱어’의 성공은 성악계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레드오션에 남을 것인가, 블루오션에 뛰어들 것인가. 요즘 젊은 남성 성악도들 사이에선 팬텀싱어 출연을 너도나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와도 공급과잉 탓에 한정된 교수직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비좁은 클래식 시장에서 교수가 돼야 좋은 연주 기회가 생기는데, 연주를 많이 해야 교수가 될 수 있는 아이러니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몇 해 전 무용 오디션 프로그램 ‘댄싱9’ 때도 그랬다. 낯설지만 경이로운 현대무용의 몸짓에 대중들은 열광했지만, 주류 무용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하지만 ‘댄싱9’을 통해 스타로 뜬 김설진·최수진 등이 관객몰이를 하면서 대표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 현대무용에도 ‘시장’이란 게 생겼다. 가족과 관계자 위주로 채워지던 무용 공연들이 이제 심심찮게 ‘전석매진’ 소식도 들려온다. 성악가들도 정통성을 고집하기보다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 공급과잉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시장은 의외로 넓을지 모른다. 시즌1 신드롬을 지탱했던 중장년 여성팬들의 힘이 만만찮다. 최근 윤종신의 ‘좋니’ 역주행 현상만 봐도 그렇다. 두 달 전 발표된 ‘좋니’는 지난 16일부터 워너원과 엑소를 제치고 8대 음원차트를 ‘올킬’하고 있는데, ‘역주행’의 의미가 각별하다. 기획사 마케팅 전략과 별도로 오롯이 입소문에 의해 대중의 진짜 사랑을 받은 셈이라서다. 그런데 이 노래, 그의 20여 년 전 히트곡 ‘오래전 그날’과 ‘너의 결혼식’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단순한 복고 열풍일까? 댄스와 힙합의 ‘리듬’이 대세인 대중음악 트렌드에서 아름다운 ‘멜로디’에 대한 중장년층 대중의 갈증을 반영한 현상은 아닐까. 바로 ‘팬텀싱어’들이 채울 만 한 틈새시장이다.

문제는 레퍼토리다. 이탈리아 가요 위주의 기성 크로스오버 곡들은 시즌1에서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1라운드 유일하게 창작곡을 부른 대학생 염정제가 돋보인 이유다. 본격 크로스오버 열전이 시작되는 2라운드 듀엣 대결부터는 얼마나 차별화된 곡들이 나올까. 창작곡이 하루아침에 쏟아질 순 없으니 다양하게 편곡된 한국곡이라도 많이 듣고 싶다. 다가오는 가을, 우리 마음을 물들이는 건 결국 우리 노래일테니.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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