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MB 때 국정원 ‘좌티즌·북바라기’ 용어 만들어 퍼뜨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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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때의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활동상황 등이 담긴 국정원 내부 보고서를 중앙일보가 23일 입수했다. 보고서에는 ‘여론전’ 방법과 성과 등이 적혀 있다. 당시 국정원이 국정 지지율을 높이고 진보세력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좌티즌’ 등의 용어를 직접 만든 정황도 나타나 있다. 심리전단은 이른바 ‘댓글부대’를 운영한 국정원 조직이다.

2009~2011년 내부 문건 입수 #심리전단 업무보고에서 사례 들어 #원세훈 전 원장은 부서장 회의서 #“종북좌파 점령한 인터넷 청소하라” #아고라 등엔 MB 지지글 6000건 #원씨 측 “심리전단 보고 안 받았다”

입수한 국정원 내부 보고서는 2009~2011년 작성된 문서로 총 30쪽 분량이다. ①심리전단 주요 업무 보고 ②현안 보고 ③원세훈 국정원장 모두발언 ④붙임 문서(일간지 칼럼 등)로 네 종류다. 검찰에 따르면 이 보고서들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이 최근 국정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포함돼 있다.

국정원 심리전단의 세부 추진계획.

국정원 심리전단의 세부 추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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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따르면 국정원 심리전단은 원세훈(66) 전 국정원장 취임 4일 뒤인 2009년 2월 16일 ‘국정원 심리전단 주요 업무 보고’ 문서를 작성했다. 문서에 기록된 국내 심리전 방안은 ①친북좌파 무력화 ②국론 결집, 국민 통합 ③국가관·안보관 확립 등 크게 세 가지였다. 친북좌파 무력화 방안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해악상 폭로, 좌편향 교과서 개정 여론 확산을 통한 좌파 고립·고사 유도 등이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원 전 원장 측은 “그런 내용의 보고를 원 전 원장이 받은 적이 없다. 재판에서 여러 사람이 증언했듯이 원 전 원장은 심리전단의 활동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9년 12월 4일 문건에는 아고라 게시 등 성과가 정리돼 있다.

2009년 12월 4일 문건에는 아고라 게시 등 성과가 정리돼 있다.

현안 보고 문건에는 국정원이 어떤 형태로 여론 조작에 개입했는지가 적혀 있다. 2009년 12월 4일 작성된 ‘대통령과의 대화 계기 국정지지도 제고 전략홍보 결과’ 문건을 보면 국정원은 같은 해 11월 27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문제 등을 설명하는 TV 특별생방송 출연을 전후로 ‘VIP의 진정성·소통리더십 부각, 좌파의 폄훼 기도 차단을 위한 전방위 전략 홍보활동’을 펼쳤다.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등에 VIP 말씀 공감, 정부 정책 지지, 좌파 공박 토론글·댓글 등 총 6000여 건을 게재했다”는 내용도 있다. “아고라에는 총 14건이 ‘베스트 토론글’로 등재돼 네티즌 10만여 명이 열람했다”는 문구도 나온다.

4대 강 문건에는 ‘좌티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4대 강 문건에는 ‘좌티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보고서에 따르면 국정원은 ‘좌티즌’ ‘北(북)바라기’ 등의 용어도 만들어 확산시켰다. 원 전 원장의 취임 초기 당시 문건인 ‘국정원 심리전단 주요 업무 보고’에는 이 용어들이 “좌파 공박 심리전 용어 개발·확산”의 예시로 나와 있다. 2010년 하반기에 4대 강 사업이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심리전단은 ‘좌파의 4대 강 사업=복지예산 감소 주장 강력 공박’(2010.9.13)이라는 문건을 통해 “좌파들의 악소문 유포를 규탄하는 사이버심리전을 전개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문건에 좌티즌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심리전단은 자신들이 만들어 유포한 UCC를 네티즌이 만든 것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4대 강 사업을 하면 복지가 줄어든다고요?’라는 제목의 UCC를 심리전단이 제작했다는 내용과 함께 이를 다룬 기사가 국정원 보고서에 실려 있다. UCC는 네티즌들이 만든 콘텐트를 일컫는 용어다.

내부 문서에는 원 전 원장의 지시도 적혀 있다. ‘국정원 전(全) 부서장회의’ 회의록에는 그가 “인터넷이 종북좌파들에게 점령됐다. 인터넷 자체를 청소한다는 자세로 다 끌어내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2009년 6월 19일자 부서장회의 ‘모두말씀’ 녹취록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은 교수, 전교조 소속 교사 등의 시국선언을 겨냥해 “여러분이 다 정리하는 맨 앞장서는 일을 해 주셔야 된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의 발언 일주일 뒤 교육과학기술부는 전국 교육청에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전교조 소속 교사 1만7000명 전원에 대한 징계조치를 요청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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