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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업 살리겠다며 공사 만드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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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정부가 공사(公社)를 설립해 해운업 살리기에 나섰다. 해양수산부는 24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해운산업 지원을 전담하는 ‘한국해양진흥공사’ 설립안을 발표했다. 핵심 기능은 해운산업에 대한 금융 지원 총괄·강화다. 올 연말까지 법을 제정해 내년 6월 부산에서 출범한다. 법정자본금은 5조원 규모다. 출발은 3조1000억원으로 하고, 수요에 따라 정부 출자금액을 늘리기로 했다.

해양진흥공사 내년 부산에 설립 #금융·비금융 정책 지원 강화키로 #노후 선박 대체 등 도맡아서 관리 #선사들 대출 보증도 5배 높이기로 #“민간금융 참여, 장기 플랜 미지수 #공사 조직체계 비효율적” 지적도

공사 설립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해운·조선업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며 ‘해양선박금융공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지난달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해운·조선 상생을 통한 해운강국 건설’을 넣었다.

하지만 이날 발표안은 공약과는 차이가 있다. 애초 구상은 금융 지원 기능에 맞춰져 있었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등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정책금융 기능을 한데 모아 업계 현실에 맞게 제대로 지원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현재 선박 투자는 산은(선박 신조 프로그램)이, 항만·터미널 투자는 수은(글로벌 해양펀드)이 하고 있다. 중고 선박 재용선도 2013년 캠코가 펀드를 조성했다. 여기에 산은과 수은이 대주주인 ㈜한국선박해양이 선박 관리, ㈜한국해양보증보험이 투자 보증을 담당했다. 정부는 이 중 ㈜한국선박해양과 ㈜한국해양보증보험을 흡수하고 추가 출자를 통해 해양진흥공사를 만들기로 했다.

‘정부가 제조업에 대한 직접적인 금융 지원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세계무역기구(WTO) 협약 때문에 조선업 지원은 공사 설립안에서 빠졌다. 공사 이름에서도 ‘선박’이 사라지고 ‘해양’만 남았다.

국내 해운산업은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 2015년 39조원이던 해운 매출액은 지난해 29조원으로 10조원 급감했다. 고가의 선박을 빌려 운영하는 선사들은 부채비율이 높아 일반적인 금융대출을 받기 어렵다. 해수부는 해운업의 특수성을 고려해 대출 문턱을 낮추고 이자가 싼 자금을 정책적으로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또 선박·터미널 투자 목적으로 선사가 다른 금융사에서 돈을 빌릴 때 보증도 이전보다 많이 서준다. 최장원 해수부 해운정책과 사무관은 “주식회사 형태일 때는 자본금의 2배까지 보증할 수 있지만 공사는 10배까지 가능하다”며 “현대상선 등 대형 선사 중심으로만 이뤄져온 정책금융 혜택이 중소·중견 선사에까지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비금융 정책 지원도 한다. 선박 운임지수, 시황 예측, 운임 공표 관리뿐 아니라 노후 선박 대체, 선사 경영상황 모니터링, 국가 재난 시 화물 운송까지 공사가 관장한다.

다만 기존 정책금융의 일부만을 통합하는 것이 효율적이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성복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그동안 산은, 수은, 캠코가 진행한 사업들을 모두 한곳에 모은다면 효과가 커지겠지만 지원 펀드와 공사가 따로 가는 것은 정책금융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정책금융은 해운업 지원의 마중물 역할을 할 뿐이고 장기적으로는 민간자본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며 “해수부가 이에 대한 장기적·전략적 플랜을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부산에 설립하는 것도 형평성 논란이 일 수 있다. 해운 관련 공사 설립은 부산 지역의 숙원사업이다. 인천시도 “대형 해운사들이 수도권에 밀집해 있다”며 유치를 추진했지만 탈락했다. 현대상선은 서울 종로구에, SM상선은 서울 여의도에 본사가 있다.

해수부는 “부산에 해운기업이 밀집해 있고 통합 대상기관(한국선박해양, 한국해양보증보험)이 위치해 있다”고 소재지 선정 이유를 밝혔다. 부산시가 두 선사의 본사 이전 유치를 추진 중이다.

해운업을 지원한다고 해도 공사와 같은 공공기관을 만들어야 하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번 만들어진 공공기관은 기능이나 인원을 줄이기 어렵다. 만들 때처럼 폐지할 때도 법을 바꿔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한국해양진흥공사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전준수 서강대 석좌교수는 “정부는 무조건 큰 조직만 있으면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국 해운의 현실은 정부 인식과 많이 다르다”면서 “대형 컨테이너와 벌크선, 정기선과 비정기선 등 대상을 세분화해 전문적인 정책을 내놔야 하는데 공사 조직은 효율성을 발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세종=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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