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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 '내 들꽃은 죽음', 김경욱 소설 '고양이를…' 본심에

중앙일보

입력

<미당문학상 후보작>

 박상순 - '내 들꽃은 죽음' 등 15편

 내 들꽃은 죽음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프랑스 니스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 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지난해 겨울은 쓸쓸했다.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외국인 청년이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무슨 일이 있나요? 하지만
 내 들꽃은, 버스에서 내렸다. 내 들꽃의
 지난여름도 쓸쓸했다.
 땅속을 벗어난 지하철이 강을 건널 때,
 중년의 여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나요?
 내 들꽃은, 웃으면서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그렇게 내 들꽃은 죽음. 웃다가 죽음.
 낚싯대를 들고 오다가 죽음.
 요리책을 읽다가 죽음. 프랑스 니스에서
 우편엽서를 사다가 죽음. 그 엽서를 쓰다가 죽음.
 커다란 여행 가방을 싸다가, 그 가방을 들고 가다가
 혼자 웃다가. 아침부터 웃다가. 내 들꽃의.
 (후략)

 ◆박상순
 1962년생. 서울대 회화과. 91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러브 아다지오』『슬픈 감자 200그램』. 현대시동인상·현대문학상·현대시작품상 수상.

 #내가 읽은 박상순 - 오연경 예심위원
 독자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가 있다. 너무 이르다고 할 시기에 불쑥 와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뒤늦은 환대를 받고 있는 박상순의 시가 그러하다. 물론 그의 매혹적인 언어를 일찌감치 호흡한 후배 시인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을 경유하여 박상순이라는 세계에 들어갈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성장한 독자와 함께 그의 시는 오늘, 다시 첨단이 된다.
 박상순은 시가 어떤 의미화의 의지를 통해 조직된 언술이 아니라 말들의 운동을 통해 생성되어가는 에너지 자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이제 우리 시의 가장 활력 있는 영역을 구축하는 추진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의 시는 뭔지는 몰라도 멈출 수 없이 그냥 읽힌다. 그냥 읽힐 뿐만 아니라 말의 탄력에 힘을 받아 어딘가로 이끌려갔다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젖어 돌아온다. 이 짧은 독서의 끝에서 우리는 어떤 감각과 감정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그것의 복원이나 설명은 불가능하다는 상태를 경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들의 경로를 따라가면서 우리의 시간과 감각이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막 생성 중이라는 것을, 시의 언어가 바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환대는 늦었지만 박상순이 한국시의 변방에 개척한 타자의 장소는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으며, 거기서 그의 들꽃은 또 다시 우리를 조금 들어 올리는 중이다.

 ◆오연경
 1974년 서울 출생. 문학 평론가.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고려대학교 기초교육원 연구교수. 계간지 '모든시' 편집위원.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김경욱 - '고양이를 위한 만찬'(문장웹진 2017년 4월호)

 "남자는 한 손에 비닐장갑을 끼더니 사료를 두어 줌 더 얹었다. 사소하지만 오래된 습관이 그렇듯 더없이 무덤덤해보이는 몸짓에는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익숙한 동작으로 고양이의 저녁거리를 챙기는 모습을 여자는 미동도 없이 지켜보았다. 움직이는 것은 시나브로 얇아지며 뒷걸음질치는 햇빛뿐. 또 다른 하루가 접시 가장자리에서 금빛으로 저물고 있었다. 여자는 ‘금혼식’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김경욱
 1971년 광주광역시. 서울대 영문과. 9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중편 당선 등단. 소설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베티를 만나러 가다』『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장국영이 죽었다고?』, 장편 『아크로폴리스』『모리슨 호텔』『황금 사과』『천년의 왕국』.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내가 읽은 김경욱 - 노태훈 예심위원
 한국 작가 중에서 김경욱만큼 다채로운 방식으로 다량의 작품을 생산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거의 두 부부가 주고받는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소설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밀도 높은 전개로 눈을 뗄 수 없이 단숨에 읽히게 만든다.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민 간 부부가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 왔는지, 또 지금도 견디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이 소설은 ‘씨랜드 화재’ 사건을 모티프로 두고 있는 것 같다. 그 화마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아이가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히는 가운데 고통스러운 상처와 기억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 부부는 늘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또 동시에 서로가 아니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을 지나왔기 때문에 각자가 서로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이 부부의 일상은 사실 그들만의 리듬일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언제나 삶의 시계가 2014년 4월 16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한국의 재난 문학은 그렇게 세월호와 함께 읽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노태훈
 문학평론가. 1984년 경남 산청 출생. 서울대 국문과.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후원:

                박상순

박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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