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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저항만 하기보다 결정권자가 되는 편이 낫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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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08면

『민주주의의 정원』 출간한 美 ‘시민대학’ 설립자 에릭 리우

에릭 리우가 매달 셋째 주 업로드되는 ‘시민대학 TV쇼’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에릭 리우]

에릭 리우가 매달 셋째 주 업로드되는 ‘시민대학 TV쇼’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에릭 리우]

2008년 한 행사장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에릭 리우.

2008년 한 행사장에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에릭 리우.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조기 대선에 따른 정치적 격변기를 지나온 한국 사회에서 최근 새롭게 주목받는 정치교양 서적이 있다. 지난 6월 말 국내에 출간된 『민주주의의 정원』(웅진지식하우스)이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신선하고 도발적”이라고 극찬한 이 책은 현재를 시민권력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로 규정하면서 좌우 프레임을 넘어선 새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 시스템을 정원에 비유한 점이 참신하다. 정원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듯 민주주의 시스템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역할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사회 시스템 스스로 돌아가게 두면 #누군가 자원 독점할 수밖에 없어 #시민권력은 지금 ‘거대한 확장’ 중 #네트워크화된 권력의 시대 맞아 #누구나 변화의 폭포 만들 수 있어

저자인 에릭 리우(Eric Liu·49)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예일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미국 시민론을 연구해 온 작가이자 사회활동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국내 정책 책임자문관으로 활동했으며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때는 연방정부 산하 전국커뮤니티서비스협회 이사로 임명됐다. 2006년 ‘시민대학(Citizen University)’을 설립한 뒤 시민권력에 대한 교육은 물론 사회활동가들의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해 왔다. 2013년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주제로 한 TED 강연은 200만 뷰를 돌파했다. 중앙SUNDAY가 그를 인터뷰했다.


지난 4월 시애틀에서 열린 시민대학 콘퍼런스에서 에릭 리우가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시민대학 페이스북]

지난 4월 시애틀에서 열린 시민대학 콘퍼런스에서 에릭 리우가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시민대학 페이스북]

에릭 리우와의 인터뷰는 지난 10일 e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그는 지난해 말 한국을 뜨겁게 달군 촛불집회와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고 했다. 리우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와 행진은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도구”라며 “하지만 시민들이 권력을 구성하고 있는 정부와 입법 기관 등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더 내구성 있는 권력으로 전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권력자들이 저지른 나쁜 일들에 그저 저항하는 것보다는 결정권을 지닌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면서다.

민주주의의 정원이란 개념이 인상적이다. 왜 하필 정원이란 표현을 썼나.
“정치와 경제는 완벽하게 효율적인 영구 운동기관이 아니라 복잡 적응 시스템이다. 그동안 시민들의 선택과 결과가 과학적으로 어떻게 상호 연결되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이러한 과학적 개념을 가장 단순하고 접근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정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정원은 단순한 은유라기보다 우리가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원동력의 가장 구체적인 예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사회 시스템은 장점과 단점이 뒤섞여 있다. 스스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자원은 누군가에게 집중되고 독점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원이라는 말에는 시적이면서 종교적인 울림 또한 담겨 있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 더욱 깊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시민적 전염성’이란 개념을 썼다. 한국 사회에선 악성 댓글이 공동체를 파괴할 거란 우려가 크다.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의 플랫폼은 해당 플랫폼의 게시물에 대한 제재 기준을 설정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우리도 어떠한 현상을 변화시킬 의무가 따른다. 매우 혼잡한 고속도로를 지나가다 한 광고판을 봤는데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슬로건이 쓰여 있었다. ‘당신은 교통 체증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이 바로 교통 체증이다.’ 즉 당신은 그런 증오성 발언이나 가짜 뉴스라는 독한 환경에 그저 갇혀 있는 게 아니다. 당신 스스로가 그것을 소비하거나 생산함으로써, 혹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독한 환경에 먹이를 주고 있는 셈이다.”
시민대학에선 어떤 것을 주로 가르치나.
“일상생활에서 시민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즉 권력의 민주화에 대해 주로 연구한다. 한국이나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상향식 시민권력은 하나의 시대정신이 됐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시민대학에서는 시민의 참여와 권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어떻게 하면 시민권력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지 가르치는 건 물론 시민의 책임감이란 가치와 문화를 육성하기 위해 새로운 시민의식을 함양하려고 노력 중이다.”
당신은 투표하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투표하지 않는 것도 의사 표현의 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투표율을 올릴 수 있을까.
“투표하지 않는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투표하지 않는 것은 이익과 신념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넘기는 ‘투표’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투표할 필요가 있는 시스템 자체가 망가졌다고 믿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는 투표가 모든 것을 해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표를 하지 않으면 시스템의 망가진 부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가 충분한 해법은 아니더라도 필수적인 건 맞다.”

그러면서 그는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핵심적 방법 중 하나는 투표를 하는 행위가 단지 엄숙한 의무가 아니라 독창적이고 즐거운 공동체의 경험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대학이 도입한 ‘투표의 즐거움’이란 프로그램도 이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면서다. 마이애미에서는 투표 등록을 하면 인기 DJ들과 파티를 즐길 수 있게 했고 필라델피아에서는 투표를 주제로 하는 보물찾기 게임을 진행한 게 대표적 사례다.

무엇보다 시민권력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실제로 시민권력이 예전보다 매력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나.
“시민권력은 더 섹시하고, 더 필요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과 폴란드·러시아의 민주 시위에서부터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 티파티(세금 감시)와 같은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흐름이 이를 입증한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사회에서 정치·경제적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돼 왔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정치에 냉담했거나 단순한 관찰자였던 수백만 명의 평범한 시민이 권력을 장악하고 적극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 ‘거대한 확장(Great Push Back)’의 한가운데 서 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시민권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됐나.
“오랫동안 정부·언론·시민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시민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해왔다. 시민권을 연구하게 된 동기는 내가 이민자의 아들이란 사실과 연관이 있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나고 자랐다.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를 누리기 위해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았다. 그저 미국에서 태어나는 행운을 가졌을 뿐이다. 부모님은 늘 모든 기회에는 그와 같거나 더 큰 의무가 따른다고 가르쳐줬다. 그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이라면서다. 이후 나는 정치판에서 어떤 일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연구하게 됐고 그렇게 쌓아 온 지식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위해 당신이 하고 있는 건 뭔가. 또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건 뭔가.
“민주주의의 정원을 잘 가꾸기 위해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를 지역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웃이나 작은 마을 또는 도시의 삶에서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더 나아질 때 사회도 더 좋아진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애틀과 워싱턴주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냈다. 최저임금 인상과 총기 사용에 대한 책임 있는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네트워크화된 권력의 시대에는 누구나, 어디에서나 정치·사회적 변화의 폭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게 지역적으로 시작되고 뿌리를 내릴 경우 더욱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에선 현직 대통령이 탄핵됐다. 그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다. 사람들은 이게 평화 시위를 주도한 시민들의 승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대규모 시위와 행진은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권력 제도와 네트워크에 참여하거나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내구성 있는 권력으로 전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를테면 권력을 구성하는 정부와 입법 기관, 사업 단체와 같은 곳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런 기관들을 통제하는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나쁜 일들에 그저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항상 그들에게 저항만 하기보다는 결정권을 지닌 사람 중 한 명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의 정치 문화에는 시민운동과 저항의 역사가 있다. 오늘날 새로운 시민운동가들은 권력자의 부패와 정실 인사에 맞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전 세계의 다른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그 교훈을 배우고 공유해야 한다. 또 시민운동의 중심축을 저항에서 권력으로 전환할 때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가 다수의 참여로 굴러가는 폭넓은 개념일수록 그 사회는 보다 탄력적이고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게 되며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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