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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냉커피 5리터가 동나는 순찰…노숙인 폭염 특별대책반 24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폭염이 절정에 이른 지난 8일 오후 2시 서울시 사회복지사 임종혁(31)씨가 분주해졌다. 5L 용량 보랭 용기에 얼음과 함께 믹스커피를 꽉 채웠다. 서울시 ‘노숙인 여름철 특별보호대책반’ (이하 대책반) 소속 막내 대원인 임씨의 '순찰' 준비다. 태양이 뜨거운 오후 1~2시에는 30분만 순찰을 해도 노숙인들에게 나눠주는 커피 5L가 금세 동난다. 그래서 소형 텀블러를 총동원해 지니고 나간다.

두 달간 54명이 2만 건 구호 활동 #폭염 속에 12시간 근무하는 대책반 #1.3km 구간을 하루 최대 6번 왕복 #"양속 가득 풀빵 들고 온 자활 노숙인"

서울시 폭염대책반 대원이 식염 포도당을 들고 서울역 광장 노숙인들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우상조 기자

서울시 폭염대책반 대원이 식염 포도당을 들고 서울역 광장 노숙인들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 있다. 우상조 기자

서울역 광장에 들어서자 노숙인 곽종만(가명)씨가 “종혁 선생”이라며 임씨를 불렀다.
“오늘은 약주 안 하셨어?” 임씨가 웃으며 인사를 건넨 것도 잠시. 숨을 가쁘게 내쉬는 곽씨를 본 임씨의 표정이 굳는다.

"병원에 모셔다드리겠다"는 임씨와 손사래를 치는 곽씨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사이, 간호사 김수민(36)씨가 다가와 곽씨 엄지손톱에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물렸다.

김씨는 “열사병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요즘 날씨엔 노숙인들의 동맥혈 산소포화도가 위험 수치인 85%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빈번하다”며 곽씨를 서둘러 휠체어로 옮겼다.

폭염 속에 저호흡증 증상을 보인 노숙인이 휠체어에 옮겨지고 있다. 우상조 기자

폭염 속에 저호흡증 증상을 보인 노숙인이 휠체어에 옮겨지고 있다. 우상조 기자

8월은 노숙인 특별보호대책반 대원들이 가장 바쁜 계절이다. 평상시 8시간인 하루 근무량이 3~4시간씩 늘어나는 것은 기본. 순찰 횟수도 두 배 가까이 늘어 한 대원당 서울역 광장에서 용산동 두텁바위로에 이르는 약 1.3km 구간을 하루 최대 6번 왕복한다. 40분이면 왕복이 가능한 거리지만 노숙인들 한 명 한 명에게 생수와 식염 포도당을 건네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면 2시간을 넘기는 일도 잦다.

지난 두 달 동안 자치구 직원, 민간 사회복지사 등으로 이뤄진 54명의 대책반이 거리를 순찰하면서 약 2만 건의 구호 조치를 했다. 빨라지고 길어진 폭염 때문에 노숙인들의 무더위 쉼터 이용 건수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약 250건 증가했다.

대책반이 광장에 누워있는 노숙인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우상조 기자

대책반이 광장에 누워있는 노숙인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우상조 기자

“노숙인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가장 큰 숙제죠.”
11년차 베테랑 사회복지사인 이태용(43)팀장은 아직까지도 고민이 많다. 경계심이 많고 사회성이 떨어진 노숙인들과 관계를 쌓는 일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커피와 빵을 건네고 안부를 묻는 일이 수개월 이상 반복되고 나서야 노숙인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씨는 서울역 인근 거리 노숙인 150여 명의 이름을 외우고 있다. 이름을 불러줘야 노숙인들이 자존감을 느끼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이씨는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안면이 익은 노숙인들은 ‘내가 무슨 선생이냐’며 먼저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노숙인 중에는 자활에 성공해 지금껏 연락을 이어나가는 이도 적지 않다. 명동 성당 앞에서 풀빵 장사를 시작했다며 양손에 풀빵을 가득 들고 쉼터를 찾아온 이도 있었다.

대책반의 활동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한밤 중에 사무실에서 “왜 사지가 멀쩡한 사람을 세금으로 도와주냐”는 항의 전화를 받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건강하다고 해서 노동이 가능한 상태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장기간 사회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알콜중독증 등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아, 신체는 물론 정신적 회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8년차 사회복지사인 김민수(35)씨 역시 “먹고 사는 일을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초년병 때와 달리 사회성 회복을 도우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2010년 노숙인 축구 동아리 ‘희망의 불씨’를 창단한 것이 좋은 예다. 지금도 김씨는 일주일에 한 번 서대문구 문화체육회관에서 노숙인 20여 명과 축구 경기를 한다. 경기가 끝나면 함께 밥을 먹는다.

노숙인들은 축구를 통해 사회성과 문화 생활 욕구를 회복하고 건강도 덤으로 얻게 됐다. 이렇게 자존감을 회복한 이들은 자활 의지가 높고 사회 적응도 빠르다. 김씨는 동아리를 통해 인연을 맺은 한 노숙인이 수년간 쉼터에서 쪽방, 고시원에서 원룸을 거쳐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재활용품 제조 기업에서 일하는 어엿한 직장인이다.

“노숙인을 그저 없어져야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쉼터에 돌아와 팔토시를 벗으며 이씨가 말했다. 그의 팔에는 햇볕에 그을린 곳과 토시에 가린 곳의 선명한 경계가 드러났다.

“노숙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밥을 굶거나 질환에 시달리는 일이 아니에요. 그들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말합니다.” 한 달 넘게 주말과 평일의 구분 없이 근무를 섰다는 이씨는 순찰을 마치자마자 다시 냉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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