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웬사가 민주화 외친 조선소, 수학여행 1번지 박물관으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다시 일어서는 발트해 도시들 <하> 교육의 장 된 역사 현장

1980년대 폴란드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작업모자들이 연대박물관 전시장 2층 천장에 설치되어 있다. [최승식 기자]

1980년대 폴란드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작업모자들이 연대박물관 전시장 2층 천장에 설치되어 있다. [최승식 기자]

동·서·북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물류의 요충지였던 발트해의 도시들은 굴곡진 현대사를 지나왔다. 독일·소련 등 주변 열강들은 무역의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 도시들을 호시탐탐 노렸다.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지나면서 폴란드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독일과 옛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각국 도시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침략의 흔적들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중앙일보·한국해양수산개발원 공동기획 #에스토니아 탈린에는 해양박물관 #러시아가 침략 후 지은 요새 개조 #해양 체험 유명, 5년간 140만 찾아 #바르샤바 유대인 격리지역 보존 #2차 대전 중 독일의 잔혹함 알려

폴란드 바르샤바엔 1939년 이곳을 침공한 독일군이 만들었던 게토(유대인 격리지구)가 지난 역사의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약 4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이 게토에서 살해당하거나 굶주려 목숨을 잃었다. 유럽 내 최대 규모였던 이 게토는 지금 대부분 무너져내렸지만 일부 벽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게토의 벽들 옆으로는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역사의 상흔이 주민들의 일상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탈린의 해양박물관 ‘시플레인 행거’는 1916년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기 위해 지은 해안 요새의 수상기 격납고를 해양박물관으로 재개발한 사례다. 2012년 개장한 시플레인 행거는 지난 5년간 140만 명이 찾은 에스토니아의 명소가 됐다.

▶관련기사
인천 곡물창고를 그단스크 호텔처럼 … 한국도 해양 문화·인프라 활용하자 

바르샤바 도심의 옛 유대인 게토 지역에 일부 남아 있는 담장의 벽돌 한 개가 빠져있다. 여기 있던 벽돌은 미국 휴스턴 박물관에서 임대해 전시 중이다. [최승식 기자]

바르샤바 도심의 옛 유대인 게토 지역에 일부 남아 있는 담장의 벽돌 한 개가 빠져있다. 여기 있던 벽돌은 미국 휴스턴 박물관에서 임대해 전시 중이다. [최승식 기자]

우르마스 드레센 해양박물관 이사는 “2010년 재개발을 앞둔 건물은 붕괴 직전이었다. 혹시라도 잔해가 떨어질지 몰라 안전모를 쓰고 들어가야 했다”고 기억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건물 천장은 부분적으로 무너져내린 상태였고, 건물을 지지하는 철골도 심하게 녹슬어 있어 보기 흉한 몰골이었다.

탈린 시 당국은 역사적 중요성이 큰 이 건물을 철거하는 대신 해양박물관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내부에 기둥이나 벽 하나 없는 거대 돔 형태인 이 건물을 가상현실(VR) 영화부터 선박 조종 게임, 해양재난 구조 체험 등 흥미진진한 체험형 콘텐트로 가득 채웠다.

기자가 찾은 지난달 말 이 박물관은 평일 낮임에도 가족 단위 관광객들로 붐볐다. 두 자녀와 함께 온 덴마크인 세바스천(39)은 “시티투어 버스로 우연히 방문했는데 내부가 충실해 놀랐다”며 “아이들의 교육에 아주 유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폴란드의 항구도시 그단스크에 있는 연대박물관도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이 박물관을 관람하러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올 정도다.

연대박물관은 1980년대 조선소 노동자들이 주도한 민주화 운동을 기리기 위해 2014년 그단스크 조선소 정문 앞에 설립됐다. 4층 높이의 건물엔 1980년 당시 노동자였던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이 ‘자유연대노조’를 설립하고 10년간 투쟁과 협상을 통해 유혈사태 없이 민주정부를 수립한 과정이 생생한 문서와 영상으로 남겨져 있다. 현재 경영난으로 영업이 사실상 중단된 그단스크 조선소가 인기 박물관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바르샤바·탈린· 그단스크=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