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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노동자들 월급 더 주고 싶어요. 근데..” 최저임금 인상에 한숨 쉬는 농민들

중앙일보

입력

지난 21일 충북 진천읍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머위를 따고 있다. 송우영 기자

지난 21일 충북 진천읍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머위를 따고 있다. 송우영 기자

200평 비닐하우스 한 동은 생각보다 길었다. 길이 80여 m인 비닐하우스 두 동을 거쳐 세 번째에 들어가니 멀리 농민이 보였다. 머위를 따고 있었다.

노동력 중요한 농촌도 #내년 최저임금 상승 걱정 #한농연 “농업인이 최대 피해” #“농업인 지원 대책 전혀 없어”

최고 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간 지난 21일 오후 3시, 충북 진천군 진천읍의 16동 짜리 비닐하우스 농장에는 주인 한모(59)씨와 태국인 노동자 아난(50)ㆍ녹(39) 부부가 일하고 있었다. 덥지 않으냐 물으니 아난은 “이때(여름)는 더워. 그런데 태국도 더워”라며 웃었다. 아내 녹도 따라 웃었다.

한씨는 1만570㎡(32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 머위와 대추를 키운다. 일손은 한씨 부부와 아난 부부 총 4명이다. 일이 몰리는 4~6월과 10~11월에는 일용직 노동자 두세 명을 더 고용한다고 한다.

아난 부부는 월 260만 원을 받는다. 한씨는 “지낼 곳과 쌀ㆍ김치 등 먹을 것은 제공한다. 수도요금과 전기료 등도 내주니까 최저임금 이상은 주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씨가 아난 부부를 고용한 지는 3년이 넘었다. 한씨는 “아난 부부가 싹싹하고 일도 잘해서 돈을 더 주고 싶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내와 함께 거의 하루종일 일해서 버는 돈이 1년에 5600만 원 정도다. 내가 얘들(아난과 녹) 많이 좋아해서 돈 많이 주고 싶은데, 솔직히 16%(내년 최저임금 인상률 정도)를 한 번에 올려주면 부담이 꽤 커진다. 시설보수비와 더불어 가장 부담되는 게 인건비다”고 말했다.

그가 한숨을 쉬게 된 건 규모가 크지않은 시골의 농가도 최저임금 상승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식 고용된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임금도 올라간다는 것이다. 한씨는 “이 친구들(외국인 노동자)은 한 달씩 월급을 받으니까 돈을 더 주는 데가 있다고 하면 당장 떠날 수도 있다. 최저임금이 많이 올라 식당이나 공장, 다른 농장이 임금을 올리면 나도 그만큼 더 줘야 붙잡을 수 있다. 부담이 커지면 일꾼 수를 줄이는 농가도 많이 생길 것이다”고 말했다.

태국인 노동자 녹은 이 농장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송우영 기자

태국인 노동자 녹은 이 농장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 송우영 기자

아난과 녹 부부는 내년 최저임금이 예년에 비해 큰 폭으로 오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기자와 한씨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녹은 “월급이 오르면 태국에 있는 아이들에게 돈을 더 부칠 수 있겠다”며 한씨에게 “우리 월급 오르는 거냐”고 물었다.

다른 농민들도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의 삼덕리 마을은 농가 30가구 중 4가구가 외국인 노동자를 상시 고용하고 있다. 하지만 임금 인상 걱정을 하고 있는 건 4가구 만이 아니라고 한다. 20가구는 일손이 부족할 때 일당을 주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데, 이 일당도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전용락(48) 진천 덕산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은 “연합회 회원 800명의 절반 정도가 하우스 농가다. 비닐하우스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해 일이 몰릴 때 일용직 노동자들도 필요한데, 이 비용이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이 올라 상시 노동자의 임금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일용직 일당도 올려줘야지’라는 요구가 생기고, 당장은 아니더라도 현재 7만~11만 원선인 일당이 서서히 올라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 회장은 또 “우리 아들들을 생각하면 최저임금을 올리는 데 찬성이다. 하지만 우리 생업은 더 힘들어지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상시 고용 노동자를 줄이고 필요할 때만 부르는 분위기로 바뀔 것이다”고 전망했다.

2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 한 동은 길이 85m 정도로 실내 온도는 40도에 육박한다. 송우영 기자

20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 한 동은 길이 85m 정도로 실내 온도는 40도에 육박한다. 송우영 기자

농민들은 뒤늦게 이런 속앓이를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논의에서 농가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지난 18일 성명서를 냈다. “농업 노동은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기초적인 생산마저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최저임금 상승으로 노동자 부족 현상이 심화하면 부정적 효과가 초래될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와 정치권, 언론에서는 영세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의 부담에만 집중하고, 최대 피해 계층 중 하나인 농민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다.

최저임금을 결정한 최저임금위원회에는 농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창구가 없었다. 최저임금위는 근로자ㆍ사용자ㆍ공익위원 각 9명씩 총 27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사용자위원은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주유소협회 인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인상은 근로자위원 최종안(7530원)과 사용자위원 최종안(7300원)의 표결에서 15대 12로 근로자위원 안이 채택돼 결정됐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지난 16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소상공인, 영세 중소기업의 피해가 없도록 지원 대책을 충분히 마련하고 후속 조치를 추가로 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 때도 농민은 언급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농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관련 내용을 기획재정부ㆍ고용노동부 등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우영 기자 song.woo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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