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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오토바이 사러갔다 쫓겨났던 여성, 이젠 시속 100㎞ 질주 즐겨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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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여성 라이더의 세계 

여성 라이더 노남열씨가 19일 혼다 측이 제공한 CBR300R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여성 라이더 노남열씨가 19일 혼다 측이 제공한 CBR300R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그냥 가세요. 여자가 무슨 오토바이를 탄다고 그래요. 안 팔 거니까 그냥 가요.”

14년 전 “여자가 무슨 … ” 문전박대 #지금은 여성 라이더 동호회도 생겨 #주변선 “위험하지 않냐” 걱정 많지만 #타보면 오히려 편안하고 마음 안정 #혼자 모터사이클 타고 전국 일주 #연해주~유럽 대륙 횡단 도전할 것

14년 전이었다. 파리바게뜨에서 제빵기사로 일하는 노남열(40·여)씨는 동네 모터사이클 판매점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모터사이클을 사기 위해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을 손에 쥐고 들른 터였다. 노씨에게 오토바이는 어릴 때부터의 ‘로망’이었다. 어떤 브랜드를 선택해야 할지, 어떤 모델이 좋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냥 모터사이클이 갖고 싶었다. 노씨는 길가에 모터사이클 여러 대를 세워 놓은 동네 판매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그러나 직원은 좋은 모델을 추천해 주기는커녕 등 떠밀다시피 나가라고 했다. ‘여자는 모터사이클을 타기 어렵다’는 설교와 함께였다.

“막무가내로 나가라 그러더군요. 안 판다고. 타다가 넘어지면 혼자서 다시 세우지도 못할 거라고. 내 돈 주고 산다는데 못 사게 하니 황당했지만 그땐 어리기도 했고 별다른 말도 못했어요. 포기하고 그냥 나왔죠.” 노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노씨에게 모터사이클은 그저 ‘꿈’으로만 남을 뻔했다. 그러나 곧 기회가 왔다. 모터사이클을 타던 친구가 일 때문에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노씨는 이때다 싶어 친구가 가지고 있던 모터사이클을 인수했다. 대림자동차에서 만든 배기량 125cc짜리였다. 노씨는 “친구가 팔기 싫어해서 거의 뺏다시피 했어요. 처음 타는 데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서 클러치 조작부터 서툴렀고 운전도 잘 못했죠. 일단 받아 온 다음에 계속 전화로 타는 법을 물어봤더니 친구는 ‘당장 세우고 절대 타지 말라’고 노발대발했어요. 그래도 기분은 마냥 좋았죠”라고 말했다.

이후 노씨와 모터사이클의 인연은 14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모터사이클을 2년 정도 탄 뒤 혼다에서 나온 1989년식 CB400 모델을 중고로 구입했다. 배기량이 399cc인 네이키드(차체를 감싸는 카울이 없이 엔진이 외부에 노출돼 있는 모델) 종류의 모터사이클이었다. 당시엔 모터사이클을 타는 여성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스쿠터가 아닌 레이서 레플리카(일반도로에서 탈 수 있도록 레이스용 모터사이클에 몇 가지 장치를 추가하고 성능을 일반도로에 맞게 바꿔 판매하는 모델)나 네이키드 모터사이클을 타는 여성은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 대형 모터사이클 하면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된 40~50대나 반항적 기질을 지닌 10대 후반~20대 초반 남성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릴 때였다. 이 때문에 노씨는 어디를 가나 ‘튀는 존재’였다.

7년간 애용한 혼다 CBR1000RR로 레이싱 서킷을 달리고 있는 노남열씨. [우상조 기자]

7년간 애용한 혼다 CBR1000RR로 레이싱 서킷을 달리고 있는 노남열씨. [우상조 기자]

노씨는 “모터사이클 하면 뭔가 거칠고 위험한 느낌이라서 주변 사람들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부모님도 처음엔 심하게 반대하셨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씨에겐 모터사이클이 토해내는 엔진 소리가 더없이 아름답게 들렸다. 그는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타고 있으면 오히려 한없이 편안하고 마음이 안정됐죠. CB400의 엔진 소리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어요. 다른 모델에 비해 조용하면서도 그 속에 강한 느낌도 있고. 연식이 오래됐는데도 ‘짱짱한 느낌’이 있었죠. 말로는 잘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노씨는 이후 2010년 엔진 배기량이 1000cc인 혼다의 CBR1000RR 모델을 중고로 구입했다. 일이 바빠도 여전히 일주일에 서너 번은 이 모델을 타고 라이딩을 즐기고, 출퇴근용으로 타기 위해 작은 스쿠터도 따로 구입했다. 혼자 모터사이클을 타고 3박4일 동안 전국 일주도 다녀왔다. 그러는 사이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여성 라이더도 깜짝 놀랄 만큼 많이 늘었다.

장진아씨가 자신의 BMW R1200R에 올라 라이딩을 즐기던 중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상조 기자]

장진아씨가 자신의 BMW R1200R에 올라 라이딩을 즐기던 중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우상조 기자]

커피숍을 운영하는 장진아(33)씨 역시 노씨처럼 모터사이클의 매력에 빠진 여성 라이더다. 스쿠터를 탄 지는 11년 정도 됐고, 4년 전부터 1200cc 대형 모델인 BMW R1200R 로드스터를 타고 있다. 장씨는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스쿠터를 타서 모터사이클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스쿠터를 타고 지인을 따라 나간 할리데이비슨 동호회에서 대형 모터사이클을 보고는 ‘언젠가 나도 타봐야지’라는 마음을 먹었다. 결국 장씨는 5년 전쯤 스쿠터가 아닌 대형 모터사이클을 직접 구입하면서 꿈을 이뤘다. 날씨가 좋은 계절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라이딩을 즐긴다. 장씨는 “평소엔 과자를 만들거나 빵을 굽는 홈베이킹도 즐기고, 요리도 좋아해요. 흔히 말하는 ‘여성스러운 취미’를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모터사이클은 이런 취미들과 완전히 다른 매력이 있어요. 안 타본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죠. 속도감도 있고, 자동차보다 훨씬 편하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장씨 역시 “여성이 타기에 위험하지 않으냐”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장씨는 “모터사이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보통 시속 100㎞ 이상으로 달리고 최대 200㎞까지 달릴 때도 있지만, 모터사이클을 제대로 타는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안 하죠. 안전장비도 다 착용합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모두 여성 라이더가 많아졌음을 피부로 느낀다고 말했다. 노씨는 “어느 순간 여성 라이더들만 모인 동호회도 생겼고 주변만 봐도 확실히 모터사이클을 타는 여성이 훨씬 많아졌다는 게 느껴져요. 텐덤(모터사이클 뒷좌석에 동승하는 것)으로만 타던 여성들이 직접 운전을 즐기는 경우도 많아졌고요. 요즘엔 모터사이클이 취미라고 하면 제일 처음 하는 말은 ‘멋있다’예요. 두 번째는 물론 ‘안 위험해?’지만요”라고 말했다.

모터사이클 업체 관계자들도 여성 라이더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혼다코리아 측은 “2013년엔 혼다 모터사이클 구입 고객 중 4.7%가 여성 고객이었는데 지난해엔 6.2%로 비율이 늘었다. 이런 추세로 볼 때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BMW 모토라드 관계자도 “지난달 고객들을 초청해 ‘캠핑 투어’ 행사를 열었는데 과거보다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고객층이 훨씬 다양해졌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직접 모터사이클을 타고 온 여성 라이더가 20~30%는 됐고 가족끼리, 연인끼리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사람도 확실히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모터사이클과 같은 이륜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필요한 2종 소형 면허를 소지한 여성은 2015년 기준 4743명이었다. 같은 면허를 소지한 남성(40만4094명) 수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수지만, 지난 2011년 2529명에 비하면 5년 새 두 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여성 라이더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미국 모터사이클협회가 2015년 4만80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모터사이클 소유자 930만 명 중 14%가 여성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역시 2013년 조사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

노씨의 다음 목표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대륙을 횡단하고 유럽까지 다녀오는 것이다. 노씨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는데 성인이 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항상 바쁘고 답답하게 느껴져요. 모터사이클에 올라 헬멧을 쓰면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것 같고, 스트레스도 전부 사라지죠. 대륙 횡단 여행도 지금은 꿈일 뿐이지만, 죽기 전에 꼭 도전해 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S BOX] 독일제 ‘R nine T’ 여성들에게 가장 인기

여성 라이더들에게 인기 있는 모터사이클 모델은 뭘까. 노씨와 장씨가 타는 모터사이클 제조 업체에 각각 물어봤다.

BMW 모토라드에서 여성 고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모델은 ‘R nineT’(사진)와 ‘F800R’이다. R nineT는 BMW 모토라드 90주년을 기념하는 모터사이클로, 2013년 출시 이후 레트로 바이크 붐을 불러일으킨 네이키드 로드스터(주행 성능에 초점을 맞춘 모터사이클)다. 디자인이 빼어나 여성 라이더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F800R 역시 역동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미들급 로드스터다. BMW 모토라드 관계자는 “인체공학적 설계와 뛰어난 출력을 자랑하고 민첩한 핸들링을 제공해 여성 고객들이 타기에 좋다”고 설명했다.

노씨가 10년 넘게 애용 중인 혼다 브랜드에선 ‘Benly110’과 ‘PCX’ 모델이 꾸준한 사랑을 받는다. Benly110은 53㎞/L의 연비를 자랑할 만큼 경제성이 뛰어나다. 또 10L 연료탱크를 장착해 동급 기종 중 가장 항속거리가 긴 ‘비즈니스 스쿠터’다.

PCX 역시 연비(54.1㎞/L)가 뛰어나고, 친환경 기술을 실현한 125cc 엔진을 탑재했다. 지난해 7146대가 판매돼 국내 모터사이클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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