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선 2035

장모님은 원더우먼 아닌데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노진호
노진호 기자 중앙일보 대중문화
노진호 문화부 기자

노진호 문화부 기자

생후 10개월 아이의 힘이 요새 부쩍 늘었다. 몸무게 10.8㎏에 키 74㎝를 겨우 넘길 정도의 꼬마 아들인데, 기어 다니는 게 어찌나 빠른지 쫓아다니다 진이 빠진다. 애를 평일 온종일 돌보는 건 온전히 장모님 몫이다. 장모는 손주를 돌보려 연초 경북 경주에서 올라와 서울 성북구의 사위 집 근처 막내딸 집에 사신다. 곧 환갑으로, 맞벌이 사위 집에 오전 7시 ‘출근’해 오후 8시까지 하루 13시간 아이와 홀로 씨름하시기엔 적지 않은 연세다.

일주일에 한 번쯤 생선회나 족발을 사다가 약주 조금 하시는 장모와 소주잔을 기울인다. 술잔 몇 순배가 돌면 아내는 “힘들지 않으시냐”고 슬쩍 묻곤 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똑같다. “손주랑 노는 게 즐겁지, 뭐가 힘드냐.” 하지만 우리 부부는 느낀다. 그 목소리에 서울살이의 낯섦과 고단함이 배어 있다는 걸. 경주에 계실 때도 손목이 좋지 않아 수술까지 했는데, 그 통증까지 종종 괴롭힌다. 그 손목으로 10㎏ 넘는 손주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어 올린다.

육아를 둘러싼 집안 어른의 이런 고군분투가 비단 우리 집 풍경만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육아정책연구소가 5세 이하 자녀를 키우는 맞벌이 여성 1736명을 조사했더니, 셋 중 두 사람(64%)이 조부모나 친인척에게 자녀 육아를 맡기고 있었다. ‘원하는 시간대에 마땅히 이용할 만한 육아기관이 없어서’라는 답이 대부분이었다. 신문을 봐도 흉흉한 사건이 반복되는 가운데 갓난아이를 생면부지 사람에게 맡길 만큼 어린이집에 대한 부모의 신뢰가 높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이마저도 형편이 되지 않으면 직장 그만두고 직접 육아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통계청 조사(2015년 기준)를 보면 경력단절을 경험한 기혼 여성의 36%가 임신·출산·육아 문제로 직장을 그만뒀다. 그래도 부모 덕분에 경력을 지켜낸 우리 부부 같은 ‘황혼 육아 유발자’들은 그래도 다행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아내는 어머니께 “수중 에어로빅 강습을 등록해 드릴 테니 한번 해보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손목 물리치료 겸 건강에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다. 한사코 사양하던 장모는 거듭되는 권유에 못 이겨 다음달부터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손주 육아 ‘근무시간’이 오전 7시부터라 새벽 6시에 강습을 들어야 하는데 체력이 되실지 걱정이다. 장모는 분명 원더우먼이 아닌데, 못난 사위는 오늘도 장모를 원더우먼으로 만들고 있다.

노진호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