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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LPGA 5수생 김혜민이 포기하지 않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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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스물 아홉살인 김혜민은 LPGA 2부 투어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든다. 그는 “매년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힘차게 드라이브샷을 하는 김혜민. [사진 김혜민]

스물 아홉살인 김혜민은 LPGA 2부 투어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든다. 그는 “매년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힘차게 드라이브샷을 하는 김혜민. [사진 김혜민]

김혜민(29)은 바이올린을 켜고,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초등생이었다. 그러다 일주일에 두 번씩 방과 후 취미 정도로 배우던 골프에 흥미를 느꼈다.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고교 3학년이던 2006년 3부 투어 랭킹 1위를 했다.

박인비·신지애·김하늘 등과 동갑 #경쟁서 밀리고 부상 불운 겹쳐 #미국 건너가 고단한 2부 투어 생활 #5년 만의 첫 우승 상금 모두 내놔 #LPGA 우승해 상금 전액 기부 꿈 #쉽지는 않겠지만 계속 도전 할 것

이후엔 쉽지 않았다. 김혜민은 1988년생이다. 박인비·신지애·이보미·김인경·김하늘·이일희 등이 다 88년생이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동기들보다 4~5년 늦은 2010년 어렵사리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1부 투어에 올라갔다. 그 때 공교롭게도 손가락을 다쳤다. 상금랭킹 76위에 그쳤다. 이듬해 출전권을 잃었다. 더 해볼 수도 있었지만 손가락 때문에 포기했다.

김혜민은 “남들의 시선이 무서웠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골프를 보고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잘 돼서 미국 LPGA 투어에 가는데 김혜민은 모든 것을 다 잃고 쫓기듯 미국으로 갔다. “아는 사람 없는 미국에 가니 기분이 좋아졌고 다시 도전할 힘을 얻었다”고 했다. 김혜민은 2012년 말 LPGA 2부 투어인 시메트라 투어 출전권을 땄다.

지난 4월 우승한 뒤 동료선수로부터 축하를 받는 김혜민. 그는 5년 만에 받은 첫 우승 상금 1만 5000달러 전액을 기부금으로 냈다. [사진 김혜민]

지난 4월 우승한 뒤 동료선수로부터 축하를 받는 김혜민. 그는 5년 만에 받은 첫 우승 상금 1만 5000달러 전액을 기부금으로 냈다. [사진 김혜민]

올해 US여자오픈을 앞두고 김혜민의 이름이 나왔다. 선수로 나온 건 아니었다. 대회를 앞두고 형편이 어려운 주니어 선수를 위한 기부금 전달식을 했다. 김혜민은 “2부 투어 첫 우승을 하면 상금을 기부하기로 했는데 그게 5년이나 걸렸다”고 말했다.

그동안 산전수전을 겪었다. 첫 해 14경기에 나가 번 돈은 6009달러(약 620만원)였다. 2014년엔 성적이 좋았다.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 최종전에 나갔다. 1라운드 전반 9홀 3언더파를 치며 선두권에 올라갔다. 그러나 10번 홀 갑자기 드라이버 입스가 찾아왔다. 이후 선수들이 ‘죽음의 사신’이라 부르는 공포증이 김혜민을 괴롭혔다.

올해는 나아지고 있다. 4월 첫 우승도 했다. 18일 현재 2부 투어 상금랭킹 15위다. 10위까지는 LPGA 투어에 직행할 수 있다. 김혜민은 “아주 열심히 하고 있다”면서 웃었다.

김혜민은 5년 만에 받은 첫 우승 상금 1만 5000달러 전액을 기부금으로 냈다. [사진 김혜민]

김혜민은 5년 만에 받은 첫 우승 상금 1만 5000달러 전액을 기부금으로 냈다. [사진 김혜민]

김혜민이 기부한 돈은 1만5000달러다. US여자오픈 상금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박성현이 받은 우승 상금(90만달러)의 60분의 1, 박성현의 캐디가 받은 우승 보너스의 6분의 1이다. 그래도 김혜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냈다. 김혜민은 “많지 않은 돈이라 조용히 냈는데 전달식까지 해서 얼떨떨했다”고 전했다.

집안 형편이 어렵지는 않다. 김혜민은 “이 나이에도 부모님에게 경비를 타서 다닌다. 감사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여유 있는 건 아니다. 돈을 아끼려 자원봉사자를 캐디로 쓴다. 12시간 이내 거리는 차로 다닌다. 맥도날드나 KFC 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로 식사를 한다. “간단한 요리를 해 먹으면 좋은데 그런 호텔은 비싸다”고 했다. 초창기 LPGA 투어를 개척하던 김미현이나 장정처럼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지금은 내비게이션, 스마트폰이 있으니 길 몰라 고생하던 선배님들보다는 덜 고생스럽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김미현과 장정은 젊고 꿈이 있었다. 1부 투어여서 우승하면 상금을 많이 받고,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김혜민은 2부 투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든다. 88년생은 이제 1부 투어에서도 베테랑이다. 동갑인 신지애는 LPGA를 떠난 지 3년이 지났다. 김혜민은 아직도 LPGA 진출 꿈을 꾸고 있다.

“매년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선수들 공 멀리 치고, 퍼트감 좋은 것 보면 놀랍다”고 말했다. 1부 투어에 간다 해도 가능성이 많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는 뜻이다. 그래도 버티는 이유가 있다. “1부 투어 대회 우승해 상금 전액을 기부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왜 그럴까. 김혜민은 “부모님이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런 특별한 부모님을 만난 건 행운이고 나도 그런 신념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혜민이 꿈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2부 투어의 외로움·공포와 싸우는 그의 도전은 의미가 있다. 어쩌면 메이저 우승자의 업적에 못지 않을 것이다. 김혜민의 행운을 빈다.

성호준 스포츠부 차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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