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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노린 ‘스파이더 범죄’ … 가스관만 잡아도 딱 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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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14일 서울 은평구의 한 다세대주택 가스관에 특수형광물질을 바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김경록 기자]

지난 14일 서울 은평구의 한 다세대주택 가스관에 특수형광물질을 바르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김경록 기자]

지난 14일 오후 서울 은평구 갈현2동의 5층짜리 다세대주택. 보호작업복을 입은 남성이 장갑을 끼고 가스관에 뭔가를 발랐다. 약 5분에 걸친 작업이 끝났지만 가스관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서울시, 다세대주택 3600곳 #창틀·가스관 등에 형광물질 발라 #특수조명 비춰야 육안 식별 가능 #한 번 묻으면 가는 곳곳 흔적 남아 #용의자 추적 가능, 침입 28% 줄어

일행 중 한 명이 가스관에 자외선 조명을 비추자 반전이 일어났다. 작업자의 손이 스쳐간 자리가 연두색 빛을 발산했다.

의문의 물질은 특수조명을 비추면 색깔이 드러나는 ‘특수형광물질’이다. 세 명의 작업자는 정인환(38)씨와 이혜림(30) 서울 은평경찰서 생활안전과 경사, 류경애(49)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주무관이다.

형광물질이 묻은 장갑도 특수조명을 받자 빛을 내고 있다. [김경록 기자]

형광물질이 묻은 장갑도 특수조명을 받자 빛을 내고 있다. [김경록 기자]

세 명으로 구성된 이 팀의 미션은 ‘스파이더 범죄’를 막는 것이다. 이날 작업은 여름 휴가철에 주택의 가스관 등을 이용해 거미처럼 벽을 타고 침입하는 범죄를 예방하는 일이다.

이 형광물질은 바르기 전엔 흰색 페인트처럼 생겼지만, 바르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효과는 도둑이나 강도가 만지거나 밟았을 때 나타난다. 만지면 끈적이지 않는 물질이 손과 발자국에 남게 되고 특수조명을 비추면 지문과 족적을 채취할 수 있다.

또 사람의 몸이나 옷에 묻으면 물에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특수물질이 조명의 자외선 파장에 반응해 형광색을 내뿜는 원리다. 더 이상의 원리에 대해서는 수사 보안상 비밀이라며 이 경사는 말을 아꼈다.

경찰관이 특수조명을 비추자 형광물질이 묻은 가스관이 빛을 발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경찰관이 특수조명을 비추자 형광물질이 묻은 가스관이 빛을 발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서울시는 지난 6월 초부터 17개 자치구 18개 구역의 다세대주택 3600곳에 이 물질을 도포했다. 주로 1층의 가스관·창문, 에어컨 실외기 등에 발랐다.

류 주무관은 “마치 도장 인주처럼 한 번 만지면 다른 곳에 여러 번 전이된다. 범인이 1층에서 만지거나 밟은 채 위층으로 올라가면 계속 묻어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범행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도포 비용은 한 주택당 3만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한 번 발라두면 눈이나 비에도 6개월~1년가량 효과가 지속된다. 시는 이 물질이 도포된 구역의 지구대엔 특수조명을 한 개(26만원)씩 배포했다.

시가 가정집에 특수물질까지 바르게 된 건 여름 휴가철이면 침입절도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17일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7~9월 발생한 절도(침입절도 포함)는 1만2285건으로 전체(4만6860건)의 26.2%였다.

창문을 열고 생활하는 여름엔 스파이더 범죄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경찰은 특수물질 도포 구역을 우범지역 위주로 선정했다. 폐쇄회로TV를 찾아보기 힘든 다세대주택, 방범창이 없는 창문, 창문 밑에 낮은 담벼락이나 에어컨 실외기가 있는 곳 등이다.

스파이더 범죄자의 신발에 형광물질이 묻으면 족적이 남는다. [김경록 기자]

스파이더 범죄자의 신발에 형광물질이 묻으면 족적이 남는다. [김경록 기자]

서울시와 경찰은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다세대주택 200여 곳에 특수형광물질을 발랐다. 이 경사는 “한 주택이 침입자에게 뚫리면 일대 구역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져 구역 전체 도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작업자도 물질이 잘 발라지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도대체 무슨 작업을 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항의하기도 한다.

영국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침입범죄 예방을 위해 특수물질을 도포하고 있다. 서울시는 이 방식을 2015년 5월부터 벤치마킹해 18개 자치구 51개 구역의 다세대주택 8600곳에 사용했다.

시는 도포된 구역엔 경고문을 부착한다.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2015~2016년 이 물질이 도포된 지역의 침입범죄 발생률이 낮아졌다. 올해 상반기엔 2015년 상반기 대비 27.6% 감소했다. 서기용 서울경찰청 생활안전계장은 “특수형광물질을 바른 곳에 붙이는 경고문이 범인들을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범죄 예방 효과를 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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