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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이건 문화혁명이 아니라 武化혁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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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38>

1 서북 군정위원회 시절의 시중쉰(앞줄 왼쪽 셋째)과 자오보핑(앞줄 왼쪽 넷째). 1954년 봄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1 서북 군정위원회 시절의 시중쉰(앞줄 왼쪽 셋째)과 자오보핑(앞줄 왼쪽 넷째). 1954년 봄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문혁(文化大革命)시절, 시중쉰(習仲勛·습중훈)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덕에 살아남았다. 유배나 다름없는 뤄양(洛陽)광산 기기창(機器廠) 생활도 문혁 전까지는 지낼 만했다.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문혁이라는 괴물이 전국을 강타했다. 당과 정부 지도자들이 홍위병의 도마 위에 올랐다. 시중쉰도 온전할 리 없었다.

홍위병 들이닥쳐 시중쉰 체포 #조반파 접견한 저우언라이 #“시중쉰 망신 준 이유 모르겠다” #조리돌림 사진 내밀며 소리 질러

1967년 1월 4일 밤, 시중쉰은 평소처럼 책과 씨름 중이었다. 11시 무렵, 밖이 웅성거리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문을 열자 10여 명이 몰려들었다. 다들 홍위병 완장을 차고 있었다.

두목 격인 홍위병이 시중쉰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서북(西北)대학 홍위병이다. 너는 반당 야심가이며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당권파다. 서북에 있을 때 엄청난 죄를 범했다. 우리와 시안(西安)으로 가자. 서북 인민들에게 네 죄를 인정해라.”

시중쉰은 일이 복잡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기창 측에 알리고 준비할 것들이 많다. 날이 밝으면 떠나자.” 홍위병들은 막무가내였다. “지금 가자.” 여차하면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뤄양역에 열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시안에 도착한 시중쉰은 서북대학 학생숙소에 수감됐다. 첫 번째 비판대회에서 전 산시성(陝西省) 성장 자오보핑(趙伯平·조백평)과 조우했다. 시문(詩文)에 능했던 자오보핑은 시중쉰의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고깔 쓰고 홍위병에게 끌려 나온 왕년의 양사익우(良師益友)와 마주하자 할 말을 잃었다. 자오보핑도 마찬가지였다. 슬픈 표정 지으며 긴 한숨 내쉬더니 슬픈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늙어서 이런 일 겪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건강 조심해라.”

시중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중앙문혁소조’ 조장으로 기세를 날리던 천보다(陳伯達·진백달) 편에 마오쩌둥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당권파와 수정주의자라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 하루속히 뤄양으로 돌아가 개조에 매진하고 싶다.”

저우언라이는 시중쉰의 처지를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 시안지구 조반파 접견한 자리에서 대놓고 한마디 했다. “모든 공격을 중지해라. 선전용 차량에 사람 태우고 조리돌림 하지 마라. 방위산업 공장에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며 시중쉰이 조리돌림 당하는 사진을 내밀었다. “시중쉰을 시안까지 데리고 가 망신 준 이유를 모르겠다. 이건 문화혁명이 아니라 무화혁명(武化革命)” 이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진도 던져 버렸다.

2 시중쉰(오른쪽)은 변방 지도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몽고 출신 국가 부주석 우란푸(烏蘭夫)와 담소하는 시중쉰. 1984년 9월, 내몽고. [사진 김명호 제공]

2 시중쉰(오른쪽)은 변방 지도자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몽고 출신 국가 부주석 우란푸(烏蘭夫)와 담소하는 시중쉰. 1984년 9월, 내몽고. [사진 김명호 제공]

16년 후 김일성을 만난 시중쉰은 당시를 회상했다. “1967년 1월, 시안의 홍위병들에 의해 비판대에 섰을 때 나는 죽은 호랑이나 마찬가지였다. 1년간 별꼴을 다 겪었다. 소식을 접한 저우 총리는 나를 군대 감옥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베이징 위수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시안을 빠져 나왔다. 보호감호였지만 감금생활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목숨은 건졌다.”

시중쉰은 8년간 가족소식도 듣지 못했다. 부인 치신(齊心·제심)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1972년 겨울,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와 애들은 남편을 못 본 지 오래다. 만날 수 있기를 간곡히 청한다. 현재 우리 모자는 갈 곳이 없다. 조직에서 거처 문제를 해결해 주면 고맙겠다. 예금도 동결됐다. 일부라도 풀어 주면 생활에 도움이 되겠다.” 저우언라이는 읽기가 무섭게 전화기를 들었다.

하루는 조사 담당관이 시중쉰을 불렀다. “나와 갈 곳이 있다.” 묻지도 못하고 따라가 보니 치신이 아들 진핑(近平·근평)과 위안핑(遠平·원평) 데리고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시중쉰이 집을 떠날 때 진핑은 11살이고, 위안핑은 8살이었다. 19살이된 진핑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1996년 12월 24일, 푸젠(福建)성 부서기 시진핑은 25년 전 베이징 교외에서 있었던 부자상봉을 얘기하며 감회에 젖었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얼떨결에 담배 한 개피를 권했다. 동시에 나도 한 대 물고 불을 부쳤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냐고 물었다. ‘사상적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최근 몇 년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고 하자 아버지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흡연을 허락한다’며 싱긋이 웃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내게 자신의 담배를 한 개피 주며 말했다. ‘이제 너는 담배를 피울 이유가 없어졌다. 돌아가면 이 담배에 불은 부치지 말고 빨기만 해라.’ 나는 아버지가 곤경에 처했던 시절에 준 선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헤어질 무렵, 치신은 저우언라이의 배려를 상세히 설명했다. 훗날 시중쉰은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저우언라이 동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도 감금 중인 옛 동지들 보호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나도 보호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시중쉰은 인복이 많았다.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예젠잉(葉劍英·엽검영)과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지지가 남달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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