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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도 잘 디자인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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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호 16면

요즘 라디오를 틀면 “세계 3대 디자이너로 꼽히는 이가 디자인했다”는 아파트 상가 분양 광고가 종종 나온다. 건설회사는 디자이너 이름을 본 떠 아예 상가 이름을 ‘카림라시드 애비뉴’로 지어 홍보하고 있다. 이집트 출신의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Karim Rashid·57). 세계 3대 디자이너 중 나머지 둘은 누구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가 유명한 건 맞다.

아시아 첫 회고전 여는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한국에서만 인기 있는 게 아니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는 전 세계 400여 개 기업과 협업해 미국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등 국제적인 디자인상만 300여 차례 수상했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그가 디자인한 휴지통 ‘가르보’를 영구 소장하고 있다. 1996년 디자인한 이 휴지통은 요즘도 하루 7000개씩 팔린다고 한다. 지난달 30일부터 그의 회고전 ‘스스로 디자인하라(Design Your Self)’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했다. 회고전을 위해 최근 방한한 그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만났다.


Hectik Space, 2017

Hectik Space, 2017

수년 전 한국에서 열린 컨퍼런스 참석차 방한한 카림 라시드를 만났을 때, 그는 분홍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재킷과 바지 색이 딸기 우유 빛깔이었다. 이번에 전시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상하의를 포함해 신발까지도 하얀색 차림이었다. 손톱에도 하얀색 매니큐어를 칠했지만 반지나 양말의 포인트 컬러는 여전히 핑크였다. 그가 디자인한 제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색이기도 하다. 왜 핑크색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었다. 꿈꾸는 듯, 나른한 눈빛의 그가 천천히 답했다.

“모든 컬러를 좋아해요. 인간의 눈이 2만 종이 넘는 색을 식별할 수 있다는 것 아세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우리 세상은 너무 회색으로 뒤덮였어요. 색은 우리 감각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쳐요. 마음의 75%가 시각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되죠. 핑크는 색 중에서도 가장 예쁜 색이에요. 기분을 돋워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하죠. 남자는 블루, 여자는 핑크로 색을 구분한 것도 페인트 회사의 마케팅 때문이에요. 세기가 바뀌기 전 태어난 아이의 방이 모두 핑크색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화려한 색, 관능적인 곡선 디자인으로 세계무대 휩쓸어

Ottawa Sofa, 2017

Ottawa Sofa, 2017

Pleasurescape, 2017

Pleasurescape, 2017

ABET LAMINATI Kasa Digitalia6

ABET LAMINATI Kasa Digitalia6

한국에 그를 각인시켰던 것도 핫핑크의 욕조였다. 땅콩모양의 욕조 ‘커플’은 새턴바스가 2008년 출시했다. 비타민 알약을 본떠 그가 디자인한 파리바게트의 ‘오(EAUㆍ프랑스어로 물)’ 생수병도 눈에 익다. 주황색 원 세 개가 겹쳐 있는 한화그룹의 CI도 그의 작품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 인간의 몸을 따라 그린 듯한 유기적인 곡선은 카림 라시드만의 디자인 어휘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죠. 유기적인 형태는 인간적인 것의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을 목표로 모든 것이 격자로 생산됐어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에요. 결과적으로 자연에 맞서온 꼴이죠. 하지만 인류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유기적인 형태와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회고전에서는 활동 초기 스케치부터 대형 설치작품까지 35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7개의 테마로 구성됐지만, 크게 두 개의 세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온라인(디지털)과 오프라인이다. 그는 “비물질적인 디지털 시대가 우리가 사는 물질 세계와 어떻게 결합하는 지에 요즘 꽂혀 있다”며 “한 순간에도 스크린을 통해 수백만 개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소통하면 좋을 지 스스로 질문하고 있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전시장의 벽면에는 그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낸 문양들이 마치 회화작품처럼 걸려 있다. 2차원 그래픽 수십 장을 겹쳐놔 3차원으로 보이게 한 작품도 있다. 그는 “디자인은 과거에서 받은 영감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라고 말했다.

오프라인 세상에서는 체험할 수 있게 제작한 대형 작품이 눈길을 끈다. 전시장 초입에 놓인 ‘글로벌 러브’는 그의 두상을 본떠 만든 듯한 대형 목제품이다. 속이 비어 있어 들어가서 앉을 수 있다. 공간에는 그가 직접 믹싱한 음악이 울려 퍼진다. 마치 그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든다.

디자인은 미래를 만드는 것,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라

Symbolik Collection KRT-1, 2006

Symbolik Collection KRT-1, 2006

카림 라시드는 이집트 카이로 출신이다. 화가이자 방송국 세트 디자이너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여행만큼 마음을 넓혀 주는 것은 없다”는 아버지의 신조에 따라 어릴 적부터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그는 “열두 살에 아버지와 함께 뉴욕현대미술관에 가서 상상 가능한 것은 창조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이후 그는 캐나다 칼턴대학교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디자이너로 출발했다.

Symbolik Collection KRT-2, 2006

Symbolik Collection KRT-2, 2006

1995년 그가 디자인한 ‘키스하는 소금ㆍ후추통’은 오늘날의 카림 라시드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연간 500만 달러어치 팔렸다. 스테디셀러인 ‘가르보’ 휴지통,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된 플라스틱 의자 ‘온 체어(1999)’ 등 그를 스타로 자리매김시킨 제품들은 모두 일상용품이었다. 이는 ‘디자인 민주주의(Designocracy)’를 주창하는 그의 신념과 맞닿아 있다. 실용적인 디자인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널리 공급해 평범한 사람들도 고급 디자인의 성과물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언제나 작고 별 볼일 없지만 디자인이 잘 되어 있는 제품을 많이 사다주셨죠. 대량생산됐지만 아름답게 디자인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어요. 이른바 디자인 민주주의죠.”

Rainboot Collection, 2011

Rainboot Collection, 2011

그는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디자인 낙관론자이기도 하다. 2010년 그가 디자인한 플라스틱 물병 ‘버블’의 경우 뚜껑에 마이크로 필터를 연결해 수돗물을 받아 마실 수 있게 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그의 경험이 녹아 있는, 친환경적인 디자인이다.

“우리는 매일 600여 점의 제품을 만져요. 많죠? 놀랍죠?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물건을 잘 디자인하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전 믿습니다. 설탕으로 의자를 만들어 잘 쓴 뒤 자연스럽게 폐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디자인은 단순히 스타일이 아니에요. 스타일은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고, 디자인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전시는 10월 7일까지 열린다. 문의 02-3143-4360 ●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아트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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