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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제는 솔직해질 때가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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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얼마 전 컴퓨터게임을 즐기는 아들에게서 한편 자랑스러우면서 동시에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각종 컴퓨터게임 세계랭킹에서 한국 선수들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더구나 그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면 그 게임의 개발자가 한국 선수의 게임을 보며 ‘아! 저게 가능하구나…’라고 감탄할 정도라고. 이런 창의력과 근성은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 주체성과 관련돼 있다. 주체성이 높은 한국인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기에 강한 성취 욕구와 그것을 달성할 추진력, 특히 스스로 판단해 상황적 어려움과 제약을 극복하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욕망·근성·창의력은 세계 유례가 없는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문 대통령의 5대 인사 공약 #스스로 배제원칙 어기고 있다 #문 대통령이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고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한국인의 주체성은 동시에 규범이나 원칙, 법률을 자기 멋대로 초월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줬다. 압축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신화를 보면 그 당시 존재했던 법률의 허점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법과 규범을 위반하는 사례들이 포함돼 있다. 큰 기업의 사업가나 정치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많은 국민이 관례라는 인식과 무관심 속에 교통 위반, 불법 주차, 절세(탈세?), 회사 공금 사적 사용(횡령?), 접대, 촌지(뇌물?), 한국식 회식문화(성희롱, 매매춘?), 음주운전 등 각종 작고 큰 법규 위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모두 벌금과 감옥에 가고도 남을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인사청문회를 보면 이러한 우리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의 상식으로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대선 공약 ‘5대 비리 배제’의 기준을 지키면 통과될 장관 후보가 거의 없을 정도다. 위장전입, 논문 표절, 세금 탈루, 부동산 투기 등 그 내용도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국민은 ‘장관 후보라는 인간이 어찌 저런 짓을…’이라고 혀를 차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압축성장의 시대를 거쳐온 기성 세대는 상당수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직접 주도했거나, 거들었거나, 방조했거나, 무마한 과정에 관여해 오다 그 일부가 이제 장관 후보가 됐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국무위원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2006년 시작됐으니 장관 후보가 지금 60세라면 거의 50세가 될 때까지 그런 5대 비리의 문제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약 25년의 사회생활을 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선발된 이들이 지금 장관 후보가 된 것이다.

특히 현재의 장관 후보들은 강태공이 아니다. 가족도 돌보지 않고 낚시나 하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돌던 주나라 문왕에 의해 재상으로 발탁되는 그런 신화는 더 이상 없다. 기성 세대는 어려서부터 입신양명으로 불쌍한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절박함에 공부하고 노력해 각종 시험과 경쟁을 이겨 온 전사들이다. 이 전사들은 원래 남들보다 욕심도 많고, 지는 걸 싫어하고, 능력도 좋아서 뭘하면 이길 수 있는지 잘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청문회가 도입되기 이전에 우리 사회가 이 전사들에게 가르쳐 준 싸움의 룰은 지금의 룰과는 달랐다. 그래서 그 배운 대로 경쟁했고, 지금 그들 중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청문회장에 앉아 있는 것이다.

결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장관 후보들의 잘못을 이해하거나 비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좀 명확히 선택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그런 경쟁에서 이겨 온 전사들 중에 지금의 청문회 기준을 통과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만약 그 수가 주요 자리를 채울 만큼 충분하지 않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그 현실을 청와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정권은 상대적으로 깨끗하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으니 그들 주변을 돌아보면 한국의 현실이 딱 보일 것이다.

선거 공약으로 5대 비리 배제를 실현할 것처럼 외치고, 지금은 ‘충분히 검증할 시간이 없어서’라고 변명하는 것은 궁색하다. 그러면 시간을 더 주면 되나? 그럼 시간을 갖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국회가 청문보고서를 거부해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만 봐주면 2기 내각의 장관 인사에는 5대 비리 없는 인사로만 다 채우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그런 인재가 없다고 밝히면 자신들도 이전 정권들과 비슷해지니까 인정을 못하나? 아니면 미래에 다른 정권의 청문회에서 자기들도 써먹어야 하니까, 지금은 얼버무리며 뭉개는 건가?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역시 나만 로맨스인가?

공약도 문재인 대통령이 했고 그 공약을 어기는 것도 대통령이 하고 있다. 이제는 솔직해질 때가 됐다. 바로 대통령이 직접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고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