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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향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8호 29면

삶과 믿음

6월의 수국이 지쳐갈 즈음, 95세 스승님이 열반하셨다는 전갈이 왔다. 출가하기 전, 원광대 원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교화실습 부교무로 부산의 어른님 계신 교당에 갔을 때다. 어르신은 나의 생글생글한 얼굴과 위트가 맘에 들었다고 후일 말씀하셨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부산에 부교무 발령을 받고 남포동이 바라보이는 사무실 ‘예지원’ 한글학당 문화센터에 근무하게 됐다.

당시 60대 중반의 어르신은 자애롭고, 말씀은 많이 안 하셨지만 정갈하게 수행을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통도사 인근 양산 배냇골에 수행훈련장을 설계하시고 기도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되면 기도터에 올라 모든 생령들에게 부처님 은혜와 맑고 훈훈한 세상 그리고 국가평화를 염원하는 기도생활을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80년을 기도와 수행으로 보내셨다. 열반 전날에 저녁식사를 하시고 새벽에 조용히 누워 홀연히 떠나셨다.

사람이 “한결같다”는 말을 듣기가 어려운 요즘 세상에 스승님은 90세를 훨씬 넘겨서도 기도생활을 계속하셨다. 우리 후진들은 감히 흉내조차도 내기 어려운 일이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오는데 차창에 가뭄 해갈의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그 옛날 30년 전에 내게 법문을 하셨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어느 날 어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도(道)꾼’이 되려고 온 것은 그 복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이 교단에 온 것이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짐승을 함부로 잡거나 살생하지 마라. 그렇게 되면 그 원한을 네가 갖고 가게 된다.”

어르신은 67년 전 6·25 전쟁이 났을 때도 지리산 운봉교당에서 낮에는 옥수수밭에 숨고 밤에는 교당에서 기도하며 나라가 태평하기를 기도했었다고 전해주셨다. 하지만 이제 그 스승님도 내 곁에 없다. 재작년 93세 때 나의 목판화 전시회에 오셔서 그림 몇 점을 고르시고 가셨다.

“우리 은광 교무가 이렇게 훌륭하게 작품을 했구나….” 이 말씀이 마지막이셨다.
일화가 하나 있다. 스승님이 한 보름 출타를 하셨다. 수행정진도량 배냇골 주변 여름의 정원에 풀이 무성했다. 제자가 바위틈은 어쩔 수 없어 제초약을 살짝 뿌려 깨끗하게 정원을 정리해 놨다. 며칠 후 스승님이 돌아와 그걸 보시고 “누가 그랬느냐” 물으셨다.

제자가 “제가 그랬습니다”고 했더니 “너 이제부터 일주일 좌선하지 마라. 그게 벌(罰)이다”고 하셨다.

“왜 좌선을 못하게 하십니까” 하고 여쭈니 “수행자가 좌선을 못하게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 제자는 참회의 미소를 지었다.

하늘의 영롱한 기운이 나에게 자리 잡았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내 마음과 통했네(天地永奇 我心定 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영기 아심정 만사여의 아심통).

거룩하셔라. 향타원 종사님.

정은광 교무
원광대 박물관 학예사. 미학을 전공했으며 수행과 선그림(禪畵)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마음을 소유하지 마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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