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받지 않을 수 있는 카톡 읽지 않을 수 있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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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호 34면

 권력백과사전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개인 또는 집단의 행동을 자기의 뜻대로 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통제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그 여자의 사전
아쉬운 쪽이 많은 사람이 덜 가진 것. 더 매달리는 쪽이 덜 가진 것. 전화를 받지 않는 것. 혹은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있는 것. 메시지를 읽지 않는 것. 종합하면 그 여자에게는 심술 혹은 심통과 상통하는 것.



권력이 오가는 시대를 지켜보다 여자는 ‘권력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자의 일상과는 너무나 멀리에 있어 도무지 와 닿지 않는 단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같은 헌법적이고 교과서적인, 남들도 나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는 그런 권력 말고는 내손에 잡히는 권력이란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것을 위해 만인 앞에서 수십 년 전의 부끄러운 가족사까지 드러내야 하고, 그것을 뺏기 위해 없는 거짓말까지 만들어 내며,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불법도 불사하는, 뭐 좀 남들이 가지고 싶어 안달인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그런 번듯한 권력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게만 살아온 것이다.

가지지 않아보니 그것을 가지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상상조차 안 된다. 단지 권력이 지고 뜨고, TV로 하루종일 중계를 하고, 누구는 잡혀가고 하는 이 시절을 보며, 왜 나처럼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올 것 없을(것 같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정말 털어보면 상관도 없는 엉뚱한 먼지 뭉치가 우수수 떨어질지도 모르는) 이런 사람 말고 저런 사람들만 권력을 잡게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릴 뿐이다.

휘두를 권력이 한 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괜히 뭔가 억울해진 여자의 전화벨이 울린다. 마땅히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뜬다.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받아봐야 그런 저런 안부일 게 뻔하다. 전화를 외면한다. 아쉬우면 또 하겠지 뭐.

그러고 나서 보니 사회학 시간에 배웠던 베버의 ‘권력’에 대한 정의가 떠오른다. 다시 뒤져보니 그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한 행위자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는 확률’이다. 나는 전화를 여간해선 끊지 않는 행위자의 저항에 맞서 전화를 끝까지 받지 않음으로써 나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렇게 내가 가진 ‘권력’의 사회학적 정의를 실감하고 나니 나는 오늘 하루 정도는 그 ‘확률’을 사소하게 높여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번 더 전화벨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라 받았더니 휴대폰 전화로 걸어온 텔레마케팅 전화다. 갑자기 또 이 상황을 통제하고픈 권력의지가 발동한다. 냉정한 목소리로 “지금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확 끊어버리는 단호한 권력을 보여줄까, 인사말도 생략한 채 본론인 상품소개부터 바쁘게 밀어넣는 저 간절한 상대방의 말을 조금 들어주면서 매너 있는 권력을 보여줄까.

“까톡.” 알람 소리가 들린다. 궁금하지만 읽지 않는다. 메신저를 24시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흔히 더 많은 권력을 가졌다고들 말하지만 더 큰 권력은 이것을 ‘안 읽음’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쪽이다. 이건 물론 밤새 카톡의 ‘1’자를 지우지 않는 권력을 맛본 뒤 내일 아침 상사에게 박살나버릴 하룻밤 사이의 짧은 권력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침대에 누워 페이스북 친구의 라이크를 눌러줄까 말까 하는 권력의 달콤한 갈등을 맛보다 잠이 들었나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바닥 밑에 떨어져 있는 전화기를 들고 허겁지겁 출근길에 나선다.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 안을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기껏 전화를 받지 않아봐야 카톡을 읽지 않아봐야,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막강 권력 스마트폰의 노예일 뿐이다.

씁쓸한 현실을 잊기 위해 다시 스마트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싶다. 아차, 그러나 충전을 까먹었다. 팟. 배터리님은 경고 신호도 없다. 재고나 ‘밀당’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냥 팟, 한순간에 무자비하게 가신다. 배터리 없이는 스마트폰 100개도 무용지물이다. 결국 하릴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나는 권력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의 서열 1순위는 배터리요 2순위는 스마트폰이요 3순위는 메시지 안 읽음’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떠올려본다. ●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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