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피터 잭슨, 영화에 미친 남자의 시한폭탄 같은 유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고무 인간의 최후'

영화 '고무 인간의 최후'

[매거진M]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영화감독은 ‘열차의 도착’(1895)을 만든 뤼미에르 형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사에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뤼미에르 형제보다 몇 년이나 앞서 최초의 영화를 만들고 동시 녹음까지 실현해 낸 감독이 있었다. 뉴질랜드 출신의 ‘콜린 맥켄지’란 이름의 이 영화인은 뿐만 아니라 1910년에 필름의 컬러테스트를 마쳤고, 달걀흰자와 자전거 체인을 토대로 한 영사기를 만들어 냈다. 이쯤 되면 대학 영화과 1학년 필수 교재인 『세계영화사』(시각과언어)를 불태워 버려야 할 수준이다.

피터 잭슨 감독의 초기 영화들

물론 위에 나열된 이야기들은 모두 날조된 ‘뻥’이다. 피터 잭슨 감독이 할리우드로 날아가기 전 만든 TV 모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5)의 내용일 뿐. 피터 잭슨 본인을 비롯,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과 배우 샘 닐, 전설적인 평론가 레너드 마틴까지 등장해 시치미를 뚝 땐 채 “콜린 맥켄지는 위대한 영화인이었어요. 비운의 감독이었고요”라고 읊조리는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실제로 뉴질랜드에선 전국 방송을 통해 최초로 ‘포가튼 실버’를 공개했는데, 콜린 맥켄지를 안다는 시청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영화 '포가튼 실버'

영화 '포가튼 실버'

뻔뻔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 거짓말은 결국 ‘영화에 미친’, ‘열과 성을 다해 완벽을 추구하는’ 콜린 맥켄지란 인물을 통해 완성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 관객들은 알게 된다. 콜린은 다름 아닌 감독 피터 잭슨 자신의 모습과 진배없다는 것을.

우리에겐 역시 ‘반지의 제왕’ 시리즈(2001~2003)로 알려진 감독이지만. 사실 피터 잭슨의 초기작들은 그렇게 길고 거대한 서사를 다루지 않았다. 피터 잭슨의 데뷔작 ‘고무 인간의 최후’(1987)는 기근에 빠진 외계인들이 인간을 햄버거로 만들어 먹기 위해 지구를 침략한다는 ‘간략하고 정신 나간’ 플롯의 이야기인데, 신문사에 다니며 감독을 꿈꾸던 피터 잭슨이 무려 4년(!)간 주말마다 동네 친구들을 불러서 만든 영화다.

허접하게 봤던 외계인의 습격으로 인해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주인공(피터 잭슨)이 도주한다. 점점 지쳐가던 주인공이 허리를 두드리려고 고개를 앞으로 숙이자, 상처 입은 머리에서 뇌가 후두둑(!) 바닥으로 쏟아진다. ‘어랏?’ 싶은 표정의 주인공. 뇌를 주워서 머리에 비집어 넣고, 허리띠를 풀어 머리통을 묶어 매보지만 뇌는 힘없이 다시 흘러내리고…, 방법을 모색하던 주인공은 뇌를 머리 위에 살짝 얹은 뒤, 야구 모자를 눌러씀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1988년 칸국제영화제 마켓 상영 도중 기립 박수가 나왔다는 이 장면은 ‘고무 인간의 최후’의 톤 앤 매너이자 피터 잭슨의 본질이 어떤 정서인지를 설명한다. 제어하지 않는 상상력 속 기괴한 유머랄까?

영화 '블스를 만나요'

영화 '블스를 만나요'

그의 이러한 면모는 차기작 ‘피블스를 만나요’(1989)를 통해 더욱 굳건해진다. 스틸 컷만 보면 아이들이 좋아 할 인형극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야말로 피터 잭슨의 작품 중 가장 노골적이고 잔혹한 정수를 담고 있는데, 외형은 EBS 어린이 프로에 나올 법하게 생긴 온갖 동물 인형들이 음모와 배신, 마약과 성매매, 치정과 살인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보여 준다.

거식증에 걸린 여자 ‘하마’와 마약과 매춘을 일삼는 ‘바다코끼리’ 부부의 범죄 조직을 중심으로, 바다코끼리의 부하 ‘쥐’는 젖소와 바퀴벌레를 데리고 포르노를 찍고, 하마의 친구 ‘토끼’는 스리섬을 하다가 에이즈에 걸린다. 또 다른 캐릭터 ‘개구리’는 베트남전쟁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데 언제 폭발할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끝내 모든 동물의 협잡이 불거지는 중반 이후, 피터 잭슨의 장기인 ‘다 죽여 버리겠다!’ 모드의 클라이맥스가 이어지는데 심지어 이 와중에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전쟁영화 ‘디어 헌터’(1978)와 오우삼 감독의 홍콩 누아르 ‘영웅본색’(1986) 등에 대한 오마주가 터져 나온다. 입을 벌리고 낄낄대다가도 ‘이거 웃어도 되는 거야?’ 하게 되는 기분은 덤.

영화 '데드 얼라이브'

영화 '데드 얼라이브'

‘고무 인간의 최후’와 ‘피블스를 만나요’는 컬트의 반열에 올랐고, 이어 피터 잭슨은 그의 대표작이자 좀비영화의 걸작 ‘데드 얼라이브’(1992)를 만들기에 이르는데….

지면이 모자란 관계로 ‘데드 얼라이브’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못할 듯싶다. 사실 너무나 유명하고 대단한 작품인지라 보탤 말도 별로 없다. 2002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유일하게 필름 상영을 했었는데, 남녀 주인공이 잔디깎기와 믹서를 들고 100여 명의 좀비를 갈아 버리는 장면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휘파람을 불었던 추억 정도?

‘킹콩’(2005)이나 ‘호빗’ 3부작(2012~2014) 같은 피터 잭슨의 후기 블록버스터들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다만 오롯이 ‘팬심’으로 피터 잭슨이 다시금 작고 단단한 영화들을 만들어 주길 바란다. 더 서늘하고, 더 발칙한 영화들을 말이다.

글=한준희 영화감독. ‘차이나타운’(2015) 연출. 영화를 보고, 쓰고, 찍는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