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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100명 '계급장 뗀' 토론…"판사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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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법관대표회의(이하 법관회의)가 법원행정처가 법관 연구모임의 활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에 대해 추가 조사를 하기로 의결했다. 앞서 대법원의 진상조사에 따라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이 회의에 참석한 판사들은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참석자들 "초반 격론, 후반은 소장파가 주도"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 조사 등 의결 #일각선 "인권법연구회가 참석자 절반" 지적

법관회의 대변인 송승용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19일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의 기획ㆍ의사결정ㆍ실행에 관여한 사람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를 비롯한 여러 의혹을 완전하게 해소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법관회의 산하에 조사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은 인권법연구회원인 최한돈(52ㆍ연수원 28기)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맡기로 했다.

19일 전국법관회의 참석자들이 회의 장소인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 대형 강의실에 모여 개회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각급 법원 대표로 선출된 100명의 법관이 참석했다. 사진=조문규 기자

19일 전국법관회의 참석자들이 회의 장소인 경기도 일산 사법연수원 대형 강의실에 모여 개회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회의에는 각급 법원 대표로 선출된 100명의 법관이 참석했다. 사진=조문규 기자

◇3000명 판사 중 대표 100명 참석

이날 회의에는 전국 각급 법원의 직급별 판사회의에서 선출된 100명의 판사가 전원 참석했고 현장에서 의장으로 인권법연구회 소속인 이성복(57ㆍ연수원 16기) 수원지법 부장판사가 선출됐다.

앞서 법원행정처는 지난 3월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을 주제로 한 국제인권법연구회(이하 인권법연구회)의 학술모임을 방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사건은 ‘연구회원인 이탄희 판사에 대한 인사 불이익 의혹→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으로 확산됐다. 지난 4월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는 대법원 규칙상 연구모임 중복가입 금지 규정을 앞세운 인권법연구회 활동 방해 의혹에 대해 “사법행정권 남용”이라고 판단했지만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등은 ‘사실무근’이라고 결론냈다. 하지만 판사 블랙리스트가 보관돼 있는 것으로 지목된 법원행정처 내의 컴퓨터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조사가 미진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법관회의는 이미 고영한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법복을 벗은 임종헌 전 차장을 사법행정권 남용의 책임자로 지목하고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사법행정권 남용’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하기로 했다. 또 법원행정처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등 인권법연구회 사태 전개 과정에 관여한 법원행정처 간부들을 업무에서 배제하고 이들에 대한 문책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힐 것도 함께 요구하기로 했다.

법원 설립 이래 세 번째로 열린 이날 법관회의는 대법원장에게 법관회의를 상설화하는 내용의 대법원 규칙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이날 안건으로 준비됐던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권 제한 문제와 법관 인사평정제도에 대한 토론은 7월24일로 정한 2차 회의에서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직 법적인 근거 규정이 없는 법관회의의 결론은 구속력이 없어 실현 여부는 양 대법원장이 수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송 대변인은 “전국 법관 대표들의 결의인 만큼 대법원장도 법관회의의 결론을 무겁게 받아들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국법관회의 대변인 송승용 수원지법 부장판사가 19일 회의장 앞에서 회의 진행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유길용 기자

전국법관회의 대변인 송승용 수원지법 부장판사가 19일 회의장 앞에서 회의 진행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유길용 기자

◇'계급장 뗀' 토론, 소장파가 논의 주도

오전 10시부터 10시간 남짓 계속된 회의에선 '고등부장' '부장판사' 등 직급을 생략하고 호칭을 '판사'로 통일했다. 이른바 '계급장 뗀' 토론이 벌어졌다. 초반에는 격론이 벌어졌으나 저녁 무렵부터는 소장파들의 강경론이 우세했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6명의 고법 부장판사를 비롯한 노장 판사들의 문제 제기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 결과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참석자는 “추가조사에 관해서도 ‘재조사를 할 명분이 뭐냐’ , ‘조사 방법과 범위를 세부적으로 정하지 않으면 의결할 수 없다’ 등으로 세부 사항에 대한 반대 의견이 초반에 많았지만 저녁부터는 구체적 방법론에 대한 의견 개진이 많았다”고 전했다. 회의에 참석한 한 부장판사는 “중립적 제안을 내면 인권법연구회 측의 집단 공세가 이어져 말할 의욕을 잃었다”고 말했다. 반면 인권법연구회원인 다른 판사는 “사전 논의에서 조용하던 사람들이 반대 의견을 고집해 논의가 더뎠다"고 말했다.

◇대표성과 의결 방식 등도 논란

이번 법관회의는 전국의 각급 법원별로 판사회의를 거쳐 대표를 선출하는 상향식 회의 구성절차를 거쳤다. 서열에 따른 대법관 제청에 대한 판사들의 집단 반발에서 비롯된 2003년 8월 ‘전국 법관과의 대화’와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논란으로 촉발된 2009년 4월 ‘전국법관포럼’이 법원행정처 주도로 소집돼 논란이 됐음을 의식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회의의 대표성에 대한 논란은 진행 중이다. 서울고법 등 일부 법원에서 판사회의 없이 법관회의 참석자가 선정된 데다 법관회의 참석자 중 “절반이 인권법 연구회다” 등의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인권법연구회는 3000명 안팎의 전체 판사 중 480여 명(약 16%)이 가입한 단체다. 회의장 밖에선 이날 회의의 의결이 거수 방식으로 이뤄진 것도 논란이 됐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흐름을 주도하는데 표결도 거수로 한다면 자유로운 토론과 전체 법관을 대변하는 의사결정이 가능할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

임장혁ㆍ유길용ㆍ손국희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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