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시험과 망각곡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논설위원

양영유논설위원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흐릿해진다. 외운 단어는 10분 후 42%, 한 시간 후 50%, 1일 후 67%, 한 달 후 80%를 까먹는다고 한다. ‘기억은 시간에 반비례한다’는 망각곡선(Forgetting Curve) 이론이다. 이를 주창한 독일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1850~1909)는 망각을 막으려면 반복학습이 중요하다고 했다.

시험은 망각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뇌가 바짝 긴장해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사투를 벌인다. 시험 공부는 복습의 연속이다. 복습은 ‘느림보 거북이’다. 고통스럽고 재미가 없다. 시험을 보지 않으면 학생들은 반복학습을 하지 않는다. 망각 속도도 빨라진다. 그런 상태가 고착화되면 실력이 평둔화(平鈍化)된다. 교육적으로 가장 경계하는 ‘시험 없는 편한 교실’의 역설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길을 가고 있다. 자율경쟁과 상대평가가 학교 간 줄 세우기와 교육 양극화를 불렀다며 시험 축소에 열심이다. 닷새 전 전국 중3과 고2가 치르는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를 번갯불에 콩 굽듯 없앤 게 신호탄이다. 국정기획자문위가 “시·도 간, 학교 간 등수 경쟁만 유발한다”며 폐지를 압박하자 교육부가 30분 만에 “예스”했다. “전수 평가로 기초학력 미달 학생이 줄어들고 실력이 향상됐다”며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자화자찬했던 교육부였다. 성적 공개로 학교 간 선의의 경쟁이 벌어지고 공부가 뒤처지는 학교엔 예산을 지원해 효과도 봤다. 그런데 국정기획위 기세에 눌려 한마디도 못하고 전국 93만 명이 20일 치를 시험을 2만8000명(3%) 표집 평가로 확 축소한 거다. 배송이 끝난 시험지는 대부분 쓰레기가 될 처지다. 총 93억원을 썼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 학생들의 성적은 하락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년마다 실시하는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지난해 읽기·수학·과학 모두 3위 안에 들지 못했다. 2000년 이후 처음이다. 맞춤형 피드백 학습이 절실한데 정권이 바뀌자마자 거꾸로 가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부터는 중학교 중간·기말고사도 없애겠다고 한다. 공부량을 30% 줄인 ‘유토리(여유)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고 학력 신장에 나선 일본 등 선진국들과는 정반대다.

학생들의 시험 고통을 줄여 주는 건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과속페달을 밟아야 할까. 학생 실력은 보수·진보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미래다. 건강한 경쟁은 필요한데 답답한 노릇이다. 망각의 시계 바늘만 빨리 돌아가게 생겼다.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