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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에만 올인 부메랑, 축구 빙하기 위기 올 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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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11면

한국 축구 민낯 드러난 ‘슈틸리케 2년8개월’

지난 15일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이날 경질된 슈틸리케 감독의 액자 사진을 합성한 모습. [뉴시스]

지난 15일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이날 경질된 슈틸리케 감독의 액자 사진을 합성한 모습. [뉴시스]

2년8개월 동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울리 슈틸리케(63·독일) 감독이 결국 경질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이란·중국·카타르에 잇따라 패배하면서 사퇴 압력을 받아왔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은 #K리그 황폐화 잊게 하는 모르핀 #A매치 인기 시들, 협회 적자 눈덩이 #명장 초빙 못하면서 계약도 저자세 #스타 선수들은 해외로 빠져나가 #태극마크 자부심도 예전만 못해

최종예선 A조에서 한국은 이란(승점 20)에 이어 2위(승점 13)를 달리고 있지만 3위 우즈베키스탄(승점 12)에 바짝 쫓기고 있다. 남은 이란전(8월 31일·홈), 우즈베크전(9월 5일·원정) 결과에 따라 한국은 조 2위까지 주어지는 본선 직행 티켓을 놓칠 수도 있다.

2014년 10월 부임한 슈틸리케는 한국 축구 역대 최장수 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재임 동안 한국 축구는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대표팀의 부진, 슈틸리케의 무능력이 문제였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대표팀에만 올인해온 한국 축구의 민낯이 드러난 기간이었다. 한국 축구에 무슨 일이 있었고,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았다.

지난 15일, 슈틸리케의 경질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잔여 연봉은 내년 6월 러시아 월드컵 본선 때까지 줘야 한다”고 말했다. 계약 해지는 월드컵 2차 예선이나 최종예선에서 탈락한 시점으로 정했는데 아직 탈락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진 사퇴’가 아니라 ‘경질’이기 때문에 1년 남은 계약 기간의 연봉을 지급해야 한다. 축구 전문가들은 “슈틸리케는 중동에서도 실패한 지도자인데 축구협회가 지나치게 저자세로 계약을 했다”고 비판했다.

슈틸리케의 잔여 연봉은 150만 달러, 그와 함께 온 아르무아 코치의 연봉도 20만 달러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을 합치면 20억원 가까이 지출해야 하는데 문제는 축구협회의 재정난이 심각하다는 데 있다. 축구협회가 홈페이지에 공시한 결산 내역에 따르면 2014년 사업 수익은 793억원이었는데 2016년엔 699억원으로 94억원이나 줄었다. 2013년 197억원, 2014년 112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지만 2015년 111억원 적자를 냈고 지난해도 34억원의 적자를 봤다.

축구협회의 주머니가 말라가는 가장 큰 이유는 국가대표팀 A매치의 상품성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A매치 입장 관중이 줄고, TV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TV 중계권료도 낮아지고 있다. 이는 대표팀 스폰서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축구협회의 재정이 열악해지면서 세계적인 명장을 감독으로 모시기 어려워졌다. 대표팀에 대한 지원도 예전만 못하다. 이용수 위원장은 “슈틸리케 후임은 국내 감독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지난 1월 프로축구연맹 총재 선거에 도전했던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물러나겠다고 한 이 위원장이 굳이 그런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건 정몽규 축구협회장의 지시를 받아서일 것이다. 축구협회로서는 슈틸리케 잔여 연봉에 외국인 감독 선임에 따른 비용까지 감당하기는 힘겨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부터 2016년 브라질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월드컵은 한국 축구에 4년마다 오는 로또임과 동시에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모르핀 주사 같은 것이었다. 축구협회는 전통적으로 월드컵·올림픽 같은 대표팀의 빅 이벤트를 통해 수입원과 존립의 바탕을 마련했다. 대표팀의 젖줄인 프로축구 K리그는 방송사들이 중계를 외면하고, 팬들이 찾아가기 꺼릴 정도로 황폐해졌지만 4년에 한 번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나가면 그 모든 것들이 잊혀지곤 했다.

국내 구단들의 자생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고액 연봉자들은 유럽과 일본으로 진출했다. 중국에 축구 광풍이 불면서 대표급 수비수들도 중국으로 떠났다. 이들이 엄청난 연봉을 받지만 실력은 정체되는 ‘중국화’가 현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 대표급 선수의 에이전트는 “선수들 카톡방에 중국팀 소속 선수가 ‘내 승리 수당은 3000만원’ ‘연봉은 세금 떼고도 20억원 넘는다’고 올리면 다른 나라 리그 선수들이 ‘부럽다. 나도 기회 되면 중국 가야지’하고 댓글을 단다”고 귀띔했다. 최근 중국 수퍼리그가 외국인 선수 출전 숫자를 줄이는 바람에 이들마저도 경기에 잘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해외파들이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다 보니 대표팀 소집 기간이 짧아지고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과 헌신성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지도자들의 하소연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4월 재신임을 받은 뒤 “대표팀 내부 상황을 외부로 발설하는 선수에게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고 경고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를 앞두고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 축구 영웅)가 뛰는 동영상을 보게 했다”는 등 대표팀 내부 일이 외부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당장 두 경기 남은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2위 안에 들어야 러시아에 갈 수 있다. 3위로 떨어지면 B조 3위 팀과 플레이오프를 거쳐 남미팀과 또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한다. 신문선 교수는 “만에 하나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 못하면 축구에 대한 관심과 관련 산업이 얼어붙는 한국 축구 빙하기가 올 것이다.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축구협회 수뇌부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요즘 감독과 선수는 종속 관계가 아니다. 국내 감독이 와서 군기 잡는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국내파·해외파를 가리지 않고 널리 공모해야 한다. 귀네슈(전 FC서울)·파리아스(전 포항 스틸러스) 등 K리그 감독 경험이 있는 지도자도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슈틸리케를 경질하고 분위기를 쇄신할 수 있는 몇 차례 골든타임을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놓쳐버렸다”며 “이란·우즈베크전은 시간이 없으므로 국내 지도자가 감독대행을 맡고 본선에 나간다면 감독대행과 외국인 감독을 놓고 한 번 더 고민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김호 용인축구센터 총감독은 좀 더 단호한 견해를 밝혔다. “9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한 번 본선에 못 가더라도 한국 축구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면 이번에 탈락하는 것도 쓴 약이 될 것”이라고 말한 김 감독은 “장기 플랜을 세워 대표팀의 뿌리인 프로축구를 살려야 한다. 모든 힘과 재원을 여기에 쏟아부어야 한다. 축구인이 아닌 정몽규 회장이 예스맨들만 곁에 두고 축구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큰 난관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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