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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 자식에게 재산 물려준다는 생각 버려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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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10면

[탐사기획] 혈연이 해체된다 <에필로그> 핏줄 간 소송 막으려면

서이종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은 “혈연 간 소송을 줄이려면 상속 안 해주고 상속 안 받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종택 기자

서이종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은 “혈연 간 소송을 줄이려면 상속 안 해주고 상속 안 받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종택 기자

2584건. 지난해 전국 법원의 주요 혈연 간 소송(유류분·부양료·상속재산분할심판 청구) 접수 건수다. 과거 많아야 한 해 수십 건에 불과했던 분쟁 건수는 2000년 이후 급증해 하루 평균 7건 수준까지 늘었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들이 한 법정에서 원·피고로 갈라져 다투다 남보다도 못한 관계로 전락하는 일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다. 중앙SUNDAY는 이 같은 혈연 해체 현상의 근본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서이종(56)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을 지난 14일 집무실에서 만났다. 사회학과 교수인 서 관장은 2015년 호스피스완화의료국민본부 사무총장을 맡은 뒤 ‘상속 안 주고, 상속 안 받기’ 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는 혈연 간 소송이 급증하는 근본 원인에 대해 “평균 수명 60세 시대에 맞춰 만들어진 관습과 법 제도를 지금까지 적용하다 보니 생긴 미스매치(불일치)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60세 시대 법, 100세 시대와 엇박자 #결혼할 때 집까지 사주는 가족주의 #부양비용 급증하는 시대엔 부적절 #노후 생계 스스로 해결하게 하고 #청년층 자립은 국가가 도와야 #유산 기부 늘려 복지 재원 충당을

어떠 점이 불일치하나.
“부모를 부양하는 자녀와 부모 재산을 물려받는 자녀가 불일치하는 게 문제다. 우리 제도는 균등 상속을 지향한다. 법정상속분이 자녀들 간 동일하고 유류분(법정 상속분의 절반)보다 못 받으면 돌려 달라고 소송도 낼 수 있게 돼 있다. 과거 장남을 포함한 아들에게 생전 증여와 상속이 집중됐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조항이다. 최소한을 보장해 나머지 자녀들의 생계를 돕자는 취지였다. 남녀 차별을 해소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부양과 상속의 연관성이 틀어지면서 갈등이 커졌다. 최근엔 균등 상속이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왜 그런가.
“오래 살게 되면서다. 1970년대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60세 안팎이었다. 50대 후반에 은퇴하고 10년 안팎의 여생을 보내다 죽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재산을 많이 받은 자녀가 부모 부양을 전담해도 통상 무리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00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소득 없이 버텨야 하는 기간이 과거보다 훨씬 길어졌고 부양 비용도 그에 비례해 치솟았다. 특히 사망 전 1년 동안은 자기 일평생 동안 쓴 병원비의 4분의 1가량이 들어가는 시기다. 재산을 많이 받았다 해도 자녀 중 한 명이 부모 부양을 전적으로 책임지기 버거운 구조가 됐다. 사회는 이렇게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데 제도는 여전히 평균 수명 60세 시대를 위한 균등 분배 콘셉트에 맞춰져 있다. 누군가는 부모 부양을 전담했고 누군가는 나 몰라라 했는데 재산은 똑같이 나눠 가져야 한다. 생전 부모 부양엔 신경 쓰지 않던 자녀들도 부모 사후 유산은 똑같이 나눠 달라고 하니 싸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서 관장은 부모들이 재산을 자녀들에게 생전에 나눠주려 하거나 사후에 물려주려 하지 말고 노후 부양비용으로 다 쓰고 가는 것이 혈연 해체를 막는 근본적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쓰고 남은 재산은 사회에 기부하는 방식을 권했다.

“어르신들 중에 보면 자녀에게 재산 다 나눠주고 이제 돈이 없으니 국가가 부양을 책임지라고 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건 지나치게 이기적인 행위다.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해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많은 노인 인구를 어떻게 국가가 다 책임지나. 기본적으로 자기 재산은 자기를 위해 다 쓰고 죽는다는 개념으로 가야 한다. 그러다 남는 건 사회에 기부해야 한다. 정 벌어 놓은 게 없는 사람은 국가가 당연히 도와줘야 하겠지만 원칙적으론 그러는 게 맞다.”

일러스트 강일구

일러스트 강일구

평생 일군 재산을 자녀에게 남기고 싶어 하는 심리도 있다.
“거액의 상속은 사회적으로 많은 부작용을 야기한다. 우선 자녀들의 독립성이 현격히 떨어진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너무 행복한 이들이 있다. 아버지에게 건물 몇 채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이다. 월세만 가지고 먹고살면 되는데 공부를 뭐하러 열심히 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부모 도움을 적게 받은 학생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금수저, 흙수저 논란까지 나오는 것이다. 또 재산을 물려준다 한들 높아질 수 있는 생활수준엔 한계가 있다. 단기간 좋아지더라도 장기적으로 원래 상태로 떨어진다. 자기 실력으로 얻은 게 아니라 지속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물려주지 않는 게 맞다. 재벌 상속만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근간을 이루는 중산층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다. 지금처럼 젊은 세대가 부모 재산에 대해 큰 기대를 품고 의존하게 둬선 안 된다.”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봉이다. 먹여주고 입혀주는 걸로 부족해 대학원 진학에 해외 유학까지 보내주고 나서도 취직을 못하면 데리고 산다. 급기야 결혼할 때는 살 집까지 해준다. 나는 이걸 지나친 가족주의라 칭한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없다. 너무 심하다. 물론 돈이 많으면 다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여유가 없는 이들도 그렇게 하는 건 문제다. 수명이 짧을 땐 가능했지만 지금처럼 부양비용이 급증하는 시대엔 부적절하다. 성인이 된 자녀는 경제적으로 독립시키고 부모는 자력으로 살아가는 보다 느슨한 가족관계로 가는 게 맞다.”
자녀 혼자 힘으로 자리 잡기 어려운 사회적 한계도 있다.
“노후 생계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하게 하는 대신 청년층이 자립하기 어려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 장가갈 때 살 집을 구할 수 없는 걸 왜 부모 책임으로 돌려야 하나. 자녀 전셋값 마련해준다고 부모가 자신의 노후비용을 탕진하고 그러다 국가에 부양을 요구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청년 일자리를 집중적으로 만들고 신혼부부가 살 임대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 최소한 사회에 자리 잡을 기회는 국가가 균등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

서 관장은 현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선 우려를 표했다. 그는 “노인도 젊은이도 전부 책임지겠다고 하는데 비용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걱정이다. 자칫하면 나라 재정을 파탄 낼 가능성이 크다. 초고령사회의 늘어나는 복지 수요를 정부가 다 감당하겠다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부족한 비용은 세금보단 유산 기부를 활성화해 충당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다. 통상 복지를 늘리려면 증세를 얘기한다. 하지만 증세는 한계가 있다. 자기가 노력해서 번 돈 대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려 하겠는가. 저항이 클 수밖에 없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부딪히는 어려움이 그 지점에 있다. 부자들은 세금 안 내려 도망가고 결국 남아 있는 중산층만 죽어 나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노후 비용을 자기가 부담하게 하고 남은 재산은 자발적으로 사회에 환원하도록 하는 게 낫다. 건물을 기부하면 이름을 붙여주는 등 기부를 사회적으로 존중하는 풍토도 필요하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가 끝날 무렵 서 관장에게 본인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중요한 건 애당초 재산에 대한 기대를 가지지 않게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기대를 안 하면 부모에 대한 원망도 안 생긴다. 나도 자녀가 3명인데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면 독립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 재산은 다 기부할 것’이라는 얘기도 반복해서 해줬다. 대학을 졸업한 첫째는 이미 알아서 독립했다. 나머지 두 자녀도 그럴 것이라 본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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