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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독일·유럽 통합 이룬 위대한 독일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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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02면

[삶과 추억] 통독의 주역 헬무트 콜

동·서독 통일 한 달 전인 1990년 9월 4일 평화광장에서 헬무트 콜 총리가 동독 군중에 둘러싸여 환영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동·서독 통일 한 달 전인 1990년 9월 4일 평화광장에서 헬무트 콜 총리가 동독 군중에 둘러싸여 환영받고 있다. [AFP=연합뉴스]

“헬무트 콜은 위대한 독일인이자 유럽인이었습니다.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이라는 과업을 이뤄냈습니다.”

'통일 총리'와 '유럽 명예시민'으로 추앙 #단 한번의 독일통일 기회 절묘하게 살려 #유로화 도입 등 유럽통합에도 일등공신 #정치자금스캔들 등 옥의 티도 남겨

87세의 일기로 16일 타계한 콜 전 독일 총리에게 바친 말이다. 동독 출신으로 그의 ‘정치적 양녀’라 불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추도사다. 메르켈은 자신을 정계에 발탁하고 스승 역할을 했던 특별한 인연의 콜 전 총리를 ‘유럽 명예시민’이자 ‘통일 재상’이라고 추앙했다.

기민당 대표 콜이 1982년 10월 1일 ‘건설적 불신임’을 통해 운 좋게 갑자기 제6대 서독 총리가 됐을 때만 해도 그가 이런 위대한 정치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골뜨기’라는 조롱을 받았던 콜 총리는 이듬해 3월 총선에서 패배해 최단명 총리가 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이를 극복해 내고 98년까지 16년 동안 전후 최장수 임기를 누렸다.

정치 역정의 하이라이트는 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부터 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까지다. 그는 메르켈 총리의 추도사처럼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적절한 사람”이었다. 당시만 해도 독일 통일은 꺼내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은 물론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구 진영에서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내부에서조차 동독의 민주화를 우선하고 통일은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콜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고 또 구현해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외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번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절호의 기회를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라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명언을 기어코 실현해 내고야만 ‘비전과 실천’의 정치가였다.

이러한 위대한 업적은 결코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콜은 오랜 앙숙 관계였던 프랑스를 비롯, 소련과 폴란드 등 이웃 국가들에 독일을 증오의 대상이 아닌 신뢰의 대상으로 만드는 노력에 혼신의 힘을 바쳤다. 제2차 세계대전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인 프랑스 베르됭을 찾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손을 잡고 화해하는 모습은 그의 진정성을 보여준 대표적 장면이다. 특히 그는 독일과 프랑스가 적이 되는 환경을 다시는 만들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불가역적인 통합’만이 유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유럽 단일통화(유로화) 도입과 유럽연합(EU) 설립 합의를 담은 마스트리흐트 조약 조인을 이끌어냈다. 장클로드 융커 EU집행위원장은 “콜이 없었더라면 유로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도했다. 콜이 유럽의 화해와 동반성장을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다. 이러한 그의 유럽 통합 노력은 통일된 독일이 결코 유럽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누구나 공(功)과 함께 과(過)도 있는 법. 총리에서 물러난 뒤 99년 터진 기민당 정치자금 스캔들은 콜이 남긴 최대 오점이다. 당시 사무총장이던 메르켈이 “콜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정치적 스승’을 비판하자 그는 기민당 명예총재직에서 물러나고 곧 정계를 은퇴했다. 콜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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