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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서 온 편지<홍성호특파원>동구휩쓰는 "자유경제바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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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구언론들은 최근 베오그라드에서 벌어진 5천여 노동자들의 가두시위와 이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받아들이기로한 유고슬라비아정부의 약속을 매우 큰 비중으로 다루어 주목을 끌었다.
종주국 소련과는 어느 정도 성격이 다르다고는 하나 전통적인 사회주의 연방공화제국가에서의 대중운동과 이에 대응하는 지도층의 태도가 하나같이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이 같은 현상은 80년대 들어 접목되기 시작한 동구제국의 경제우위정책-자본주의로의 접근-이 낳고있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동시에 표출시킨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이 나라에 국한된 양상이 아니라 인근의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등이 함께 앓고 있는 성장단계의 홍역이다.
황새걸음으로 앞서가고 있는 서구를 흉내내기 위해 뒤늦게 쫓아나 선 동구권이 뱁새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기업의 자유경쟁, 소득세나 부가가치세등 새로운 세제의 도입, 수출 촉진을 위한 외국자본의 유치, 능률위주로의 사회체제 전환등이 대규모 해고사태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를 불러 일으키고 해묵은 물자 부족의 시련은 소비자시장을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생활필수품의 연간 인플레율이 1백35%에서 최고 2백%나 되며 2백억~3백50억 달러나 되는 외채 또한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헝가리에서는 서구식 세제도입으로 탈세를 목적으로 한 지하경제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더군다나 인플레를 억제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근로자 봉급을 인하, 사회적 불안요인을 가중시키고 있기도 하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지난 여름 5억 달러에 달하는 이 나라 경제사상 금세기 최대의 금융부정사건까지 터져 집권층이 휘청거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물꼬를 제대로 잡지못한 자본주의의 세찬 물결이 홍수와 가뭄을 번갈아 일으키며 동구를 휩쓸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듯 싶다.
그러나 경제파탄으로 치닫는 이 같은 위기 속에서도 동구 각국은 그들의 장래가 암담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서구쪽의 견해다.
그것은 이들이 비록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시달림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실험이라는 체험을 통해 집권층은 집권층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다듬어 가고 있다는 귀중한 성과가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군사·사회등 거의 모든 면에서 소련의 교조적인 이데올로기에 매달리다시피 살아온 동구제국이 이제는 각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세우고 또 이를 과감히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동구권에서 「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서기장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로 알려져 온 폴란드 국가평의회의장 「야루젤스키」가 「스탈린」시대 소련의 탄압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공산블록내의 터부를 깨뜨린데 이어 최근 들어서는 그 자신이 불법진단으로 규정했던 자유노조측과의 대화를 제안한 것 또한 지난해까지만 해도 기대할 수 없던 일이었다.
또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들은 지난주 「고르바초프」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미소군축협상이 공산권의 기본적인 이익에 위배된다는 견해를 간접적으로 피력, 소련이 추구해온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듦으로써 서방측을 놀라게 했다.
그 같은 태도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적어도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층이 종전처럼 소련의 일방적인 진로 제시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만은 확연하다고 볼 수 있다.
오랜 기간동안,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소련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초 서독방문을 감행한 동독국가평의회의장 「호네커」의 결단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의 해석처럼 「고르바초프」의의 재가와 관련이 없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
폴란드나 체코·동독의 움직임이 모두 동구권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처음있는 일」로 기록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들 나라가 요즘 단순한 자본주의 진통만을 겪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다.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듯 동구제국의 상층부 또한 빵과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대열에 줄지어 나서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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