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트럼프의 독대, 문재인의 독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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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제임스 코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증언은 충격이다. 그의 증언은 수퍼보울(미국 프로미식축구 결승전)에 버금가게 미국인들을 TV 앞으로 끌어모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문제가 걸려 있으니 예삿일이 아니다.

FBI 국장 충성 요구해 파문 #우리는 정권 바뀔 때마다 물갈이 #유진룡 전 장관의 사례 보면 #장관 아니라 머슴만 찾았던가 #급해도 절차적 정당성 쌓아야 #정권 뛰어넘어 정상화할 수 있어

필자가 주목하는 건 다른 부분이다. 트럼프가 코미에게 러시아 스캔들 수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한 다음 날. 코미는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에게 FBI의 독립을 위해 다시는 트럼프와 독대(獨對)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독대가 문제라고?

코미가 지난 1월 6일 트럼프 당선인을 처음 만났을 때 독대를 하게 됐다. 1월 27일 백악관 저녁식사도 단둘이었다. 2월 14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는 트럼프가 사위 쿠슈너 등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했다.

트럼프는 만날 때마다 자리를 미끼로 수사 중단을 요구했다. 공적인 관계가 아닌 정치적 충성을 요구했다. 코미는 “FBI 국장은 전통적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게 될까 봐) 크게 걱정됐다”고 말했다.

코미의 증언을 들으면서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통령은 누구든 열심히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권위적인 불통 대통령들만 보았던 탓인지 모르겠다.

대통령의 코드 인사에도 무감했다.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을 임명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독립된 기구, 임기가 보장된 자리가 무슨 의미인지 왜 몰랐을까.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그가 명령대로 움직이는 부하는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장의 독대를 금지했다. 꼭 누군가 배석하도록 했다. 독대는 권력기관장에게 힘을 실어 주고, 절대 충성을 제공받는 수단이었다. 한번 맛을 들이면 포기하기 어려운 중독성이 있다.

박근혜 정부 초기 국정원 댓글 사건이 터졌다. 코미와 달리 국정원장이 사적인 충성을 다한 것이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국정원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기소했다. 얼마 뒤 혼외자 보도가 터지더니 취임 5개월 만에 채 총장은 쫓겨났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윤석열 수사팀장도 좌천됐다.

코미도 잘렸으니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그런데 그 뒤가 다르다. 의회가 청문회를 통해 트럼프의 사법방해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FBI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함께 나섰다.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사생활을 훔쳐보며 낄낄거리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웃고 즐기는 사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우병우 사단’이 검찰과 국정원을 장악했다. 공정해야 할 수사기관·정보기관이 권력자의 사병(私兵)이 됐다.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아닌 청와대 민정수석이 인사권을 휘둘렀지만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았다. 이석수 특별감찰관, 박관천 경정의 내부 경고는 짓밟아 버렸다.

그 우병우 사단이 지난주 대거 물을 먹었다. 안태근 전 검찰국장과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은 이미 돈봉투 회식 사건으로 수사를 기다리고 있다. 전광석화처럼 인사가 이루어졌다. 누가 인사를 한 건가.

민주당의 박영선 전 대표는 페이스북에 고흐의 ‘꽃게’ 그림을 올렸다. 꽃게는 뒤집히면 스스로 다시 뒤집을 수 없다. 꽃게처럼 검찰도 스스로 개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검찰은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 그렇지만 꽃게를 뒤집어 준다고 문어가 되는 건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누군가 그 꽃게를 다시 뒤집을지 모른다.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없이 인사가 이루어졌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도 조국 민정수석으로부터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잔여임기 15개월이 헌재의 독립성을 위협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낙연 총리에게 임명장을 주며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하필 바로 전날 장관 후보자 4명을 발표했다. 형식적으로라도 제청하도록 하루를 못 참았을까.

민주주의는 절차다. 절차를 무시하면 정당성이 흔들린다. 5년 뒤에는 조국 사단이란 이름이 붙을지 누가 알겠는가. 공직자는 내 부하가 아니라 나라의 일꾼이다. 나를 빛내줄 병풍을 찾아서는 곤란하다. ‘조금 문제가 있어도 내가 쓸 사람 아니냐’며 너그러운 척할 일이 아니다.

유진룡 전 문체부 차관은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의 청탁을 거부하다 “배 째 드릴까요”라는 폭언을 들었다. 그 덕분에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장관에 기용했지만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돕지 않다 쫓겨났다. 좌건 우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장관이 아니라 머슴이었던 것이다.

우리 권력기관들을 미국과 비교하기는 무리다. 절차를 따지기에는 기본마저 무너져 있다. 그럴수록 인내하며 절차적 정당성을 쌓는 것이 정권을 뛰어넘어 정상화하는 길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