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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에는 좌절·숙성기 필요…원리주의만으론 달성 어려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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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22면

[경영, 인문학에 길을 묻다] 게오르크 뷔히너 『당통의 죽음』

연극 ‘당통의 죽음’의 한 장면.

연극 ‘당통의 죽음’의 한 장면.

요절한 독일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Karl Georg Büchner, 1813~1837)의 데뷔작인 『당 통의 죽음(Dantons Tod)』은 1835년 발표된 희곡작품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트라스부르크와 기센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던 20대 청년 뷔히너는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혁명에 영향을 받아 혁명가들과 친교하고 반체제 운동에 가담하면서 지명수배를 받아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시절에 쓴 작품이 바로 『당통의 죽음』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프랑스대혁명의 대표적인 두 지도자 조르주 당통(George Danton)과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를 중심으로 한 권력다툼과 피의 보복 등 격동기의 이야기를 독특한 시각에서 다루었다. 『당통의 죽음』은 1902년 베를린에서 초연되면서부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상영되는 인기작품이다. 이제 이 작품의 배경설명과 함께 연극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왕정 복고 혼란 겪은 프랑스혁명 #60년 지나고 나서야 공화정 완결 #과업 지향형 리더 로베스피에르 #극단적 공포정치 펴다 단두대로 #인간관계 지향적인 리더 당통은 #20세기에 민주주의 수호자로 복권

당통 "혁명은 자기 친자식도 잡아먹는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한 지 5년이 되는 1794년 3월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한 혁명정부는 공안위원회가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파가 장악한 공안위원회는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반대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면서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파리에는 다음 희생자가 중도 온건파이자 로베스피에르의 라이벌인 당통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통은 1792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 유럽 동맹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베르됭이 포위되었을 때 입법의회에서 “조국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 많은 용기가!” 라고 사자후를 토하며 참전을 독려했다. 시민들은 이런 그를 여전히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파는 그의 체포 시기를 조심스레 저울질하고 있었다.

연극의 초반부는 당통이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환락을 즐기면서 반대파들에 대한 비판과 혁명 정국에 대한 냉소를 보내는 장면으로 출발한다. 그는 에베르파의 반 기독교화 운동을 비난하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도 비판한다. 그는 “혁명은 새턴(로마신화에 나오는 농업의 신)과 같아서 자기 친자식을 잡아먹는다” 고 비아냥거린다. 그리고 “민중은 쾌락주의자들을 증오한다네, 마치 내시가 건강한 남자들을 미워하듯이…” 하면서 혁명의 주체세력이면서도 호의호식하며 쾌락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조롱한다.

연극 중반,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만남에서 긴장이 고조된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도덕이라는 것이 악덕이 될 수도 있으므로 도덕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를 그만둘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은 아직 반밖에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가진 자들을 마저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당통은 그가 도덕의 탈을 쓰고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양심은 깨끗하다고 응수한다. 당통은 “당신은 하늘이 보낸 경찰이라도 된다는 건가?”라고 힐문하며 혁명이 공화국에 이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는 죄 없는 시민들을 죄인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나는 죄 없는 사람을 한 사람도 죽인 일이 없다”고 응수했고, 당통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퇴장해 버린다.

당통의 초상화

당통의 초상화

이 사건 이후로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을 죽여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얼마 후 당통은 공안위원회에 체포되어 투옥된다. 혁명재판이 열렸고 로베스피에르가 선임한 재판장은 당통이 역모를 꾀한 죄로 기소되었다고 말한다. 당통은 자신에게 부과된 혐의를 중상모략이라고 모두 부인하면서 자기야말로 혁명의 상징이며 구체제(앙샹 레짐)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애국자임을 역설한다. 당통의 열변에 재판 방청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당통 만세”를 부르며 당통을 기소한 공안위원들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검찰 측의 논고를 듣고 시민들의 반응은 달라진다. 일부 방청객들은 당통은 호의호식하면서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는 타락한 사람이며 부르봉 왕가의 사람들, 심지어 영국군 장군들과 내통한 부패한 정치인이라고 비난한다. 이에 비해서 로베스피에르는 덕망이 있고 청렴한 혁명가라고 치켜세우며 로베스피에르 만세와 반역자 당통 타도를 외쳤다.

결국 1794년 4월 5일 당통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로베스피에르파가 승리한 것이다. 당통이라는 걸림돌이 사라지자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정치를 확대했고 가뜩이나 경제난에 지친 민중들의 불만이 가속됐다. 민중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 내부 반대파에 의해 체포돼 1794년 7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당통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다. 그후 프랑스는 총재 정부를 구성했으나, 외국군의 침공과 경제파탄으로 정국이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자 나폴레옹이라는 젊은 장군이 허약한 정부를 쿠데타로 쓰러뜨리고 집권했다. 나폴레옹이 독재정치를 하다가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여 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공화정의 기치를 내건 프랑스혁명 정신은 빛이 바래게 되었다.

혁명처럼 파괴적 기업 혁신은 거의 없어

프랑스혁명은 사회변혁의 역설적 모순을 가르치고 있다. 프랑스는 대혁명을 통해 짧은 기간 내에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정으로 이행했다. 이어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공포 정치에 질린 시민들은 반동정부를 채택했다. 군사쿠데타에 이은 제정이 들어서고 그 후 왕정이 다시 복구되는 대혼란을 겪었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혁명이 사회변혁을 통해 명실상부한 시민 민주주의 공화정으로 완결된 것이 1848년 2월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이 혁명을 통해 자유·평등·박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근 60년이 걸린 셈이다.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슘페터는 1947년 경영에 있어서 ‘혁신(innovation)’ 이라는 개념을 학문적으로 처음 도입했다. 이후 무수히 많은 기업들이 혁신의 기치를 내세우고 기업조직을 바꾸려고 했지만, 근본적인 혁신이 달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업무의 내용과 방식을 변경하는 점증적 혁신은 여러 번 있었지만, 프랑스혁명처럼 기업조직을 근본부터 바꾸는 ‘파괴적인 혁신’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혁명사를 되돌아보면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혁명의 명분이 좋다고 해도 국가안보와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은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혁명주체들은 국왕을 비롯하여 성직자와 수구 귀족들을 숙청하고 국민주권을 확립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군대의 침공, 그리고 경제난에 따른 물가폭등과 기아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민중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처단되고, 대체되는 악순환을 겪었다. 두 번째 교훈은 난세의 혼란기에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인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경영 리더십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두 영웅이 활동하던 프랑스대혁명 시대와 오늘날 기업이 당면한 경영환경이 닮았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서 공포 정치도 마다하지 않는, 극단적으로 ‘과업지향적인 리더’였다. 이에 비해서 당통은 전형적인 ‘인간관계 지향적인 리더’였다. 당통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 제1공화정을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한 투사였지만 친화력이 뛰어나 귀족들로부터 거리의 여자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포용했고 온건한 정치노선을 견지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이에 비해서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이데올로기에 충실하여 반혁명 분자들은 누구든지 인민의 적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처단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리더십 상황이론에 의하면, 혁명과 같이 혼란기에는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과업지향적 리더가 성과를 많이 낼 수 있어서 리더로서 적합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혁명과업 수행에서 많은 실적을 달성하여 대중의 복수심을 충족시킴으로써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공포정치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스스로 공공의 적이 됨으로써 인간관계의 파탄을 가져왔고 결국 단두대가 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장사란 결국 이문이 아닌 사람 남기는 것"

세월이 흘러, 20세기에 이르자 당통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복권돼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 여기저기에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혁명노선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로베스피에르를 칭송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중들은 극단적 과업지향적 리더를 싫어한다는 것을 로베스피에르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비극적 죽음은 현대의 조직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혁신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나 원리에 충실한 것만으로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모든 혁신에는 좌절과 숙성기가 필요하다. 프랑스혁명이 제대로 된 성과를 달성하는 데 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이처럼 한 조직이 기존의 질서를 동결시키고, 변화시키고 재동결시키는 혁신의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단번에 혁신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기업은 리더를 바꾸어 가며 꾸준히 혁신을 하고 때로는 좌절도 겪고 그러면서 숙성을 하면서 혁신을 지속하는, ‘혁신의 사이클’을 거치면서 풍상을 이겨 내야 한다. 과거의 체제를 부정하고 단죄하는 혁신의 폭풍우 속에서도 사람을 선대하고 인재를 알아보며 선행을 베푸는 리더는 살아남을 수 있다. 조선후기 거상 임상옥은 “재물은 흐르는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장사란 결국 이문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요즘과 같은 조직혁신의 리더십 교체기에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김성국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대학장
서울대 인문대 졸업, 독일 만하임대 경영학박사, 베를린 자유대 등 객원교수 역임. 대한리더십학회 초대 회장, 한독경상학회·한국인사조직학회 및 아시아-유럽미래학회 회장, 한국경영대학·대학원협의회 이사장. 『인적자원관리 5.0』 『모멘트 리더십』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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