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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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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가 케인스 흉내를 내다 망신을 당했다. 최근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다. 트럼프는 법인세를 현행 35%에서 15%로 낮추는 자신의 대규모 감세정책을 설명하며 “미국 경제에 ‘마중물(priming the pump)’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다음이 ‘오버’였다. 그는 “마중물이란 표현을 전에 들어본 적이 있나.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엊그제 생각해 냈고, 아주 좋은 생각이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마중물은 펌프질을 할 때 미리 붓는 물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3년 이를 빗대 “수요 부족으로 경제가 자생력을 잃을 때엔 정부 재정지출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0년이 더 된 명언을 자기 것이라고 우겼으니 아무리 ‘막말 대왕’이라지만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

마중물은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한 단어다. 창조경제의 연관 검색어 1위가 마중물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화융성이 창조경제의 마중물이자 결과물”(2015년 8월 대국민담화)이란 식으로 이 표현을 즐겨 썼다. 하지만 박근혜표 창조경제는 목표와 전략이 부재했다. 지금도 창조경제의 뜻이 뭐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최순실 게이트와 블랙리스트가 드러나면서 박근혜표 마중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마중물이란 표현은 살아남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 단어를 즐겨 쓴다. 주로 일자리와 관련해서다. 후보 시절 “민간부문에서 일자리를 못 만들고 있으니 공공부문에서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당청이 5일 내놓은 11조2000억원 규모의 추경안에도 마중물이란 표현이 눈에 많이 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번 추경은 일자리 마중물 추경”이라며 “여야가 대립해 시기를 놓친다면 국민도 크게 실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도 “공공부문이 민간부문 고용 둔화를 보완하면서 좋은 일자리 창출의 마중물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보수와 진보 모두 이 말을 즐겨 쓰는 데엔 이유가 있다. 처음 정책을 펼 때 그 필요성을 납득시키기에 이보다 좋은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려 써야 한다. 아예 마른 우물엔 마중물이 소용없다. 마중물이 아니라 봇물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일자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목조목 필요한 곳에 마중물이 잘 가길 바란다.

나현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