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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올여름 패션 마침표, 슬리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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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회사에 왜 슬리퍼를 신고 오나?

통이 넓고, 발목 드러나는 팬츠 등 #격식 내려놓은 옷과 매치하기 쉬워 #브랜드 로고 뚜렷한 제품들 인기

가죽이나 퍼(fur) 등 고급 소재를 활용한 슬리퍼가 인기다. 영국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가 2017 봄 여름 시즌 패션쇼에서 선보인 슬리퍼 패션

가죽이나 퍼(fur) 등 고급 소재를 활용한 슬리퍼가 인기다. 영국 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가 2017 봄·여름 시즌 패션쇼에서 선보인 슬리퍼 패션.

패션 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은 발뒤꿈치가 훤히 보이는 슬리퍼를 신고 회사에 온 부하 직원에게 핀잔 섞인 잔소리를 했다가 유행도 모르는 ‘아재’ 취급을 받았다. 올여름 혹시나 슬리퍼를 신고 격식 갖춰야 하는 자리에 오는 사람이 보여도 눈을 질끈 감아겠다. 슬리퍼가 그 옛날 슬리퍼가 아니니 말이다.

올여름은 샌들보다 슬리퍼다. 2016년부터 이어진 블로퍼 열풍에 이어 블로퍼의 여름 버전, 즉 앞뒤가 모두 시원하게 트여 있는 슬리퍼가 인기다. 블로퍼(Bloafer)는 뒤가 없다는 뜻의 백리스(Backless)와 끈 없는 낮은 구두인 로퍼(loafer)의 합성어. 앞은 구두 모양인데, 뒤는 슬리퍼처럼 트여 있는 형태의 신발을 말한다.

럭셔리 브랜드의 슬리퍼 경쟁

고무 소재의 미우미우 풀 슬라이드 (슬리퍼)

고무 소재의 미우미우 풀 슬라이드(슬리퍼).

그렇다고 동네 수퍼마켓 갈 때 신는 편안한 슬리퍼를 떠올리면 오산이다. 샤넬·디올·미우미우 등 명품 패션 브랜드부터 슈콤마보니나 주세페자노티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슬리퍼 열풍에 가세했다. 무시당할 만한 슬리퍼가 아니란 얘기다. 일단 디자인이 한층 고급스러워졌다. 가죽이나 퍼(fur) 등 고급 소재를 슬리퍼에 사용한 게 눈에 많이 띈다. 가령 샤넬은 체인 장식, 루이비통은 자물쇠 장식 등 브랜드 고유의 심벌을 더했다.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말론 슐저의 블로퍼.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말론 슐저의 블로퍼.

판매도 잘되는 편이다. 2017년 3월 국내 매장에 입고된 영국 디자이너 브랜드 안야힌드마치의 ‘양털 슬리퍼’는 한 달 만에 완판됐다. 슬리퍼 한 족 가격은 109만원이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 지방시의 ‘밍크 슬리퍼’ 역시 올 4월 10족이 입고돼 완판되었다. 이 제품 역시 한 족에 80만원에 육박한다. 공급 물량이 적어 완판이 대수롭지 않다고? 비슷한 카테고리인 샌들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스위스 패션 브랜드 아크네 스튜디오는 가죽 슬리퍼와 함께 비슷한 디자인의 5㎝ 굽의 샌들을 출시했다. 슬리퍼가 샌들보다 40% 이상 더 많이 판매되고 있다. 슬리퍼라고 해서 샌들에 비해 크게 저렴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슬리퍼는 55만원, 샌들은 67만원이다.

힐에서 내려오다

루이비통 특유의 자물쇠 심벌을 살린 슬리퍼.

루이비통 특유의 자물쇠 심벌을 살린 슬리퍼.

슬리퍼의 인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올여름 슬리퍼와 함께 매치하기 쉬운 옷들이 유행하기 때문이다. 통 넓은 편안한 느낌의 와이드 팬츠와 발목이 드러나는 크롭트 팬츠가 대표적이다. 여성복 브랜드 구호를 담당하는 삼성물산 패션부문 김영대 과장은 "최근 슬립온이나 블로퍼 등 굽이 없고 가볍게 신고 벗기 편한 신발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다”며 "특히 와이드 팬츠를 구입하러 온 고객들이 함께 코디할 수 있는 슬립온과 슬리퍼를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슬리퍼의 유행을 운동복처럼 편안한 일상복을 뜻하는 ‘애슬레저룩’이나 집에서 1마일(1.6㎞) 이내에서 입는 옷을 의미하는 ‘원마일 웨어’의 유행과 흐름을 같이한다고 봤다. 격식을 갖춘 옷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패션이 유행을 타며 슬리퍼가 재조명받는 것이다.

슬리퍼의 고급화 바람이 불고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격이 가벼운 게 사실. 프라다의 2017 봄·여름 신상 제품인 ‘러버 슬라이드’는 60만원대, 미우미우의 ‘풀 슬라이드’는 30만원대다. 슬리퍼치고는 물론 절대 가볍지 않은 가격이다. 하지만 같은 브랜드 신발과 비교했을 때 슬리퍼만큼 ‘만만한’ 가격대의 제품은 드물다. 럭셔리 브랜드의 신발은 대부분 100만원대다.

로고를 돋보이게 만든 지방시 슬리퍼.

로고를 돋보이게 만든 지방시 슬리퍼.

김홍기 패션 큐레이터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로 평소 원하던 명품 브랜드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에 가치를 느끼는 심리도 있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가성비가 좋다는 얘기다. 이런 심리는 브랜드의 로고가 크게 박혀 있거나 브랜드 특유의 심벌이 들어간 제품이 유난히 인기 있는 현상과 일맥상통한다. 갤러리아 명품관 이경민 패션 바이어는 "샤넬의 상징인 카멜리아 장식이 더해진 슬리퍼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며 "한때 로고가 숨겨진 럭셔리 브랜드 제품이 인기 있었던 것과 비교해 로고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슬리퍼의 인기는 확실히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무심한 듯 멋스럽게

앞이 막힌 슬리퍼인 구찌 블로퍼를 신고 공항 소녀시대 수영

앞이 막힌 슬리퍼인 구찌 블로퍼를 신고 공항패션을 선보인 소녀시대 수영.

슬리퍼가 편안함의 대명사지만 슬리퍼와 함께 매치하는 패션까지 무작정 편안해선 안 된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매치하는 것은 슬리퍼의 매력을 외려 반감시킨다. 황금남 패션 스타일리스트는 "여성은 스커트에 구두나 샌들보다 낮은 슬리퍼를 더하고 남성은 단정한 슬랙스에 셔츠를 입고 슬리퍼를 더하면 한층 세련된 룩을 연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요지는 옷은 차려입고 신발에는 힘을 빼라는 것이다. 둘 다 힘을 줬다가는 너무 과해 보인다. 이런 면에서 슬리퍼는 평범함을 최고 가치로 치는 ‘놈코어’ 트렌드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가볍게 신고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은 듯이 멋을 부릴 수 있다. 그게 슬리퍼의 진짜 매력이다.

글=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사진 각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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