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40년 … 그 역사는 민주화 향한 울부짖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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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임말이 본딧말보다 흔히 통용된다면 그건 이미 하나의 사회현상이란 말이다. 그리고 그 줄임말이 40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졌다면 그건 하나의 체제란 뜻이다. 계간지 '창작과비평', 아니 창비가 올해로 창간 40년을 맞았다. 22일 오후 6시30분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1985년 12월 26일 ‘창작과비평사의 등록 취소에 관한 범지식인 2853명의 건의문’ 과 서명록을 전달하기 위해 문공부 매체국장실을 방문한 지식인들. 왼쪽부터 이우성,이효재, 박완서, 이호철, 박연희, 황순원씨.

창비의 역사는 한국 민주화의 역사다. 판매금지와 회수, 강제 폐간의 역경에도 창비는 굽히지 않았다. 창비가 주창한 분단체제론과 민족문학론은 70년대 이후 한국 지식인사회를 움직인 동력이자 정신이었다. 백낙청(68) 편집인은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창비의 성과는 한국사회가 기울인 집단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창비 40년을 되짚는다.

역사, 시작되다=생년월일 1966년 1월 15일, 부피 130여 쪽, 가격 70원. 광복 이후 한국 최초의 문예지 창비 창간호의 출생기록이다. 미 하버드 대학에서 갓 돌아온 28세 평론가 백낙청은 창간호에서 이렇게 밝혔다.

1988년 2월 17일 창작과비평사 명의를 회복하고 27일 현판식을 했다. 왼쪽부터 발행인 김윤수씨, 편집인 백낙청씨.[창비 제공]

"먼길을 어찌 다 가며 도중의 괴로움을 나눠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오직 뜻있는 이를 불러 모으고 새로운 재능을 찾음으로써 견딜 수 있을 것이요, 견디는 가운데 기약된 땅에 다가서리라 믿는다."

이로써 한국문단엔 참여문학의 시대가 열렸고, 리얼리즘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김수영.신동엽.김지하.신경림.김정환.최영미 등의 시인과 이문구.송기숙.이호철.현기영.황석영.박완서.공지영 등의 소설가가 창비를 발판으로 활동을 벌였다. 인문사회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영희.강만길.박현채.안병직 등 비판적 지식인들이 참여해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저항 담론을 생산했다. 6.15선언 이후엔 통일시대 담론 '6.15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창비 40년, 민주화 40년=창비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다. 출판사 '창작과비평사'를 세운 74년 백낙청 편집인은 서울대에서 해직됐고 75년 봄호는 김지하의 시가 실렸다는 이유로 회수됐다. 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고, 85년엔 출판사 등록마저 취소됐다. 당시 지식인 2853명이 이에 항의해 건의문에 서명하기도 했다.

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가 실리자 당시 주간 이시영 시인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적도 있다. 하나 백낙청 편집인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탄압받았을 때가 덜 힘들었다. 그땐 전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었던 때라면, 물질적 기반 갖추고 훌륭한 인재도 모였는데 과거와 같은 활력이 떨어진 최근이었다."

"운동성 회복하겠다"=최근의 창비는 예전처럼 활발한 모습이 아니었다. 영향력과 권위는 여전했지만 주요 필진이 제도권에 소속되면서 창비는 일반독자와 멀어졌다. 급격히 변화한 사회환경도 창비의 부진을 거들었다. 올 초 세대 교체를 감행한 건 이러한 위기감과 무관하지 않다. 신임 편집주간으로 백영서(53.연세대) 교수가 취임했고, 진정석(43).이남주(41).이장욱(38) 등 젊은 필진이 상임편집위원으로 새로 합류했다.

14일 배포된 2006 봄호는 이와 같은 노력의 첫 결과물이다. 디자인이 산뜻해졌고 글이 평이해졌다. 계간'문학동네' 편집위원인 평론가 황종연씨가 백낙청 편집인을 인터뷰한 '도전인터뷰'도 신선했다. 신임 백영서 주간은 혁신의 방향을 "운동성 회복"이라고 밝혔다.

"운동성 회복이란 창비를 비롯한 진보세력의 자기쇄신을 가리킨다. 우선 일반독자가 접근하기 쉬운 글쓰기를 선보일 것이다. 이를 통해 논쟁적인 글쓰기를 시도할 것이다. 실명비판을 강화해 실천적 논쟁 잡지로 거듭날 것이다. 이제껏 현실에 대해 유효한 발언을 했어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론이 되기 일쑤였다는 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창비는 이외에도 여러 혁신 방안을 마련했다. 4월 온라인에 개설할 '창비주간논평'은 사회 비평과 문화 담론을 매주 제공할 계획이다. 또 같은 달 일본어판 '창비'웹진을 개설하고 내년엔 중국어판도 열 예정이다. 대규모 학술행사도 준비했다. 24~25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한류 현상을 진단하는 한일 공동 심포지엄이 열리고, 6월엔 서울 등지에서 한국.중국.일본.대만의 진보적 잡지 편집자들이 참석하는 심포지엄이 열린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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