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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국공립대 네트워크’에 웃는 지역 국립대, 우는 사립대, 떠는 서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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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거점 국립대 9곳의 학교 상징(엠블럼).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총괄했던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은 이들 지역 거점 국립대를 명문대 수준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왼쪽 상단부터 강원대, 경상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제주대, 충남대, 충북대. [학교 홈페이지]

지역 거점 국립대 9곳의 학교 상징(엠블럼).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총괄했던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은 이들 지역 거점 국립대를 명문대 수준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왼쪽 상단부터 강원대, 경상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전북대, 제주대, 충남대, 충북대. [학교 홈페이지]

 "한 마디로 '환영'이다. 예산도, 자율권도 없이 수도권 사립대와 경쟁했던 지역 국립대에 활로가 생겼다."(지역 국립대 기획처장)
 "자칫 정부 지원을 국립대로 몰아주는 식이 될까 두렵다. 이미 벼랑 끝에 몰려있는 사립대의 형편은 한결 어려워질 거다."(수도권 사립대 부총장)
 "'서울대 폐지론은 아니다'라고 하지만, 어떻게 믿겠나. 국립대 통합하면서 서울대만 예외로 두겠나."(서울대 사회대 교수)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 , '대학 서열화 해소' 방안 # "지역 거점 국립대를 명문대로 육성” 교육비 대폭 지원 # # 경북대ㆍ전북대 등 “재도약 기회 온다” 정책 연구 착수 # 사립대들 “지방 국립대에 지원 뺏기고 학생도 감축?” 울상 # 서울대 교수ㆍ학생 “‘제2의 서울대 폐지론’ 될라” 긴장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국공립대 네트워크'를 두고 이처럼 시각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국공립대 네트워크는 지역 거점 국립대를 집중 육성해 국공립대의 연합체를 통해 대학 서열화 해소를 해소하겠다는 구상이다.

 인구ㆍ산업ㆍ학생의 수도권 집중화에 따라 침체됐던 지역 국립대들은 이 공약을 두고 “재도약의 기회가 왔다”며 환영한다. 반면 사립대들은 정부 지원이 국공립대에 쏠려 자신들은 소외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고, 서울대는 향후 논의가 ‘서울대 폐지론’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강원대·경북대·경상대·부산대·전남대·전북대·충남대·충북대·제주대 등 9개 대학의 기획처장들이 충북 청주의 충북대에 모였다. ‘지역 거점 국립대’로 불리는 이들 대학의 관계자들은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이 밝힌 ‘국공립대 네트워크’ 공약에 대해 논의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참석했던 한 기획처장은 “지역 국립대를 육성해 대학 연합의 ‘구심점’으로 삼겠다는 공약에 참석자 모두 적극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9개 국립대들은 국공립대 네트워크 실현을 위한 정책을 공동 연구하기로 하고, 정부에 연구비 지원 등을 요청키로 했다.

 반면 문 대통령의 당선 직후인 지난 11일 서울대생의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는 국공립대 네트워크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제안하는 글이 올랐다. 이를 제안한 학생은 “서울대를 포함한 국공립대 모두를 하향 평준화시킬 것""대학 서열화 해소 대신 사립대 중심의 서열을 강화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학생들은 “즉시 반대 서명을 하자”는 찬성 입장,“구체적인 정책이 나오기 전에 대응하면 ‘긁어 부스럼’”이라는 반대 의견으로 나뉘어 댓글ㆍ게시글을 올렸다.

 며칠 뒤 서명을 제안했던 학생은 “논의를 총학생회에 맡기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29일 서울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선거 전 세부 사항을 묻는 질의서를 후보 캠프에 보냈으나 답변을 받지 못한 상태"라며 "다음달 기말고사가 끝나면 온라인을 통해 학생 의견을 수렴하고, 단과대학 대표들과 논의한 뒤 대응 방향을 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애초 국공립대 네트워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지난 1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가 출간되면서다. 책에서 문 대통령은 서울대와 지방 국공립대 간의 ‘연합 대학’ 구상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국립대들이 함께 입학하고 공통된 커리큘럼 속에서 여러 캠퍼스를 오가며 과목별로 다른 캠퍼스에서 강의를 들은 뒤 졸업할 때 같은 학위를 받게 된다”고도 말했다.

 이를 두고 1968년 대규모 학생 시위 이후 파리 내 13개 대학을 통합 운영하면서 공동학위를 수여하는 프랑스 파리대학 식의 '대학 평준화'와 유사하다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서울대 폐지론’을 의식한 듯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게 아니라 다른 국공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자는 뜻”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공립대 네트워크 구상은 지난 4월말 공개된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공약집에 '거점 국립대의 집중 육성' '거점 국립대의 교육비 지원 확대' '국공립대 공동 운영체제' ‘중장기적으로 한국형 네트워크 대학 구축’등의 문구를 통해 반영됐다.

 그러나 애초 언급됐던 공동 선발ㆍ학위제는 공약에서 빠졌다. 대선 교육 공약 작성에 참여했던 더불어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서울대의 포함 여부, 공동 선발ㆍ학위제 실시, 대학 간의 통합 수준 같은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캠프 내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향후 설치될 국가교육회의(대통령 자문기구)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대선 캠프에서 검토했던 ‘로드맵’은 세 단계다. 선거 기간에 캠프 측이 교육단체(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보낸 답변서에 따르면<표 참조> 1단계에선 준비 단계로 지역 거점 국립대들을 ‘서울의 사립 명문대’ 수준으로 육성한다. 이어 2단계(중기)에선 거점 국립대의 연합 체계를 구성한다. 대학 간의 강의·교수ㆍ학생 교류를 확대하고 공동 운영 방안을 마련하는 단계다.

 장기에 해당하는 3단계에선 ‘공영형 사립대’에도 문호를 개방한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하돼 공익 이사 임명 등을 통해 대학 운영에 참여하는 공영형 사립대의 도입을 공약했다.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다른 관계자는 “장기적으론 국공립대 네트워크에 공영형 사립대들이 연합한 ‘한국형 대학 네트워크’가 목표”라고 설명했다.

국공립대와 사립대 비교

국공립대와 사립대 비교

지역 국립대 “재도약의 기회” vs 사립대 “우리만 구조조정?”

대선 당시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교육 공약 입안에 참여했던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은 지난 18일 한 포럼에서 “새 정부에선 거점 국립대를 명문대로 만드는 게 일차적 방향"이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지역 거점 국립대 9곳에 예산을 대폭 지원해 학생 1인당 교육비를 현재 1500만원 수준에서 서울의 상위 5개 사립대 수준(2190만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지역 거점 국립대들은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김학용 전북대 기획처장은“1980년대만 해도 서울의 여느 사립대를 능가했던 지역 국립대들이 수십년간 ‘수도권 쏠림’이 계속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은 지역 국립대가 침체를 벗어나고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선순환’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태 경북대 기획부처장도 “지역 국립대에 대한 지원은 지역 학생의 취업을 돕고 지역 산업 발전과 주민 복지 향상 등 여러가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이 처장은 "국립대들이 각자의 특화 분야를 살려 선택과 집중을 하는 한편, 해외 학생 유치 등엔 함께 나서는 등 여러가지 시너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면 이를 바라보는 사립대들의 표정은 어둡다. 서울 소재의 A대학 기획처장은 “고등교육 예산이 크게 늘지 않는 한, 정부가 국립대에 지원을 집중하면 사립대 몫은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 크다”며“8년 이상 등록금이 동결돼 ‘마른 수건’을 다시 짜내는 식으로 버텨온 사립대로서는 한층 어렵게 됐다”고 걱정했다.

 사립대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학생 수 감축이다. 지난 18일 김 전 교육감은 전체 대학생 중 국공립대 학생의 비율을 현재 24%에서 40%로 늘린다는 계획을 공개하면서 “국공립대 수를 늘리겠다기 보다는 학생 수를 조절하려 한다"고 밝혔다. 충남의 한 사립대 총장은 “인구 감소로 전체 대학생 수를 줄이는 판국이라 ‘국립대 학생 비중을 늘리겠다’는 발언은 그만큼 사립대 정원은 줄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1주기 대학구조개혁평가(2014~2016년)에서 4만 4000명의 정원을 줄인 교육부는 올해 착수할 2주기 평가에서 5만명을 추가 감축할 계획이다.

서울대 정문의 모습[중앙포토]

서울대 정문의 모습[중앙포토]

“제2의 서울대 폐지론?”서울대 초긴장

 이러한 흐름에서 서울대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지난 3월 기자간담회에서 국공립대 네트워크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밝혔다. 또 지난 25일 언론 인터뷰에서도 “국공립대 통합은 실현하기 쉽지 않을 것”“세계적 수준인 서울대를 하향 평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른 보직 교수는 “정책이 구체화되기 전에 섣불리 대응했다가는 긁어 부스럼이 될까 걱정돼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서울대가 특히 민감하게 여기는 부분은 서울대와 지역 국립대 간의 공동 선발ㆍ학위제다. 공약에선 빠졌지만 교수들은 “언제고 다시 불거질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과학대의 한 교수는 “서울대가 참여하지 않는 지역 국립대 연합으로 기존 대학 서열을 해체하는 게 가능하겠냐. 네트워크를 추진하는 입장에선 서울대를 꼭 넣고 싶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김 전 교육감도 공동선발ㆍ학위제에 대해 “당장 실시하기 어렵겠지만 검토는 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 교수와 학생 사이에선 '국공립대 네트워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압도적이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은 “대학 연합의 초보적인 단계인 강의 공유만 해도 학생들이 특정 학교에 몰리면 해결할 방법이 있겠는가. 장애물이 많은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문대의 한 교수도 “공동 선발제나 공동 학위제를 도입해 서울대가 현행 입시의‘정점’에서 사라진다면 고려대ㆍ연세대 등 사립대 중심의 서열화는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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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수(교육학)는 국공립대 네트워크 구상에 대해 “대학끼리 한정된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공유대학' 모델 자체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계적인 통합, 운영은 자칫 비효율을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6년 단행된 강원대ㆍ삼척대, 부산대ㆍ밀양대 등 지역 국립대 간의 통합은 이후 크고 작은 갈등을 불러왔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교육학)은 “지역 대학을 육성한다는 취지엔 공감하지만 대상을 왜 국립대로 한정했는 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배 교수는 “먼저 대상 대학들이 ‘지역 거점’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구체적으로 검토한 뒤 적절한 지원을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천인성 기자 guch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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